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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서서히 열에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커피포트처럼 일상의 소리들이 제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복도식 아파트만의 정겨운 소음이었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소리, 복도를 오가는 느린 발걸음, 어느 집은 현관문이 열리자 주인을 기다리던 개가 목청 높여 짖기도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를 달래며 걸음을 재촉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두런두런 섞여드는 목소리 끝으로 바닥에 끌리는 유모차가 탈탈 바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복도 밖, 먼 곳에서 나는 소리들에서 멀어지며 조금 더 가까운 곳에 귀를 기울이자 얕은 숨소리가 들렸다. 두꺼운 암막커튼을 쳐진 방 안은 여전히 한 밤중이었다. 커튼 아래로 아침볕이 어른거릴 뿐 방 안은 어둑했다. 잠버릇이 유난히도 부산스러워 한 자세로 자는 법이 없는 여가 몸을 뒤스르고 있었다. 덕분에 아침마다 어김없이 침대시트를 정리해야하는 거 고스란히 신의 몫이었다. 누운 자리만 보더라도 누가 누웠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여가 누웠던 쪽의 침대 시트는 유난히도 밀려 내려와 있었다. 지금도 여는 온몸을 옴죽거리며 이불을 꼭 틀어잡고 있었다. 잠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에 유독 눈두덩이 뻐근했다. 곤히 잠에 취해있는 여의 숨소리를 들으며 허리에 팔을 감아 마른 몸을 끌어당기자 가슴팍에 등이 닿아오며 두 몸이 꼭 맞아 들어갔다.
잠결에도 여는 곧잘 온기를 찾아 품을 파고들고는 했다. 나 좀 안아줘.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여는 저를 더 끌어 안아달라는 듯이 몸을 옹송그리며 몸을 바짝 맞대어오고는 했다. 원체 몸에 열이 없는 편이여서인지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겨울용 파자마에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으면서도 새우잠을 잤다. 어깨가, 손끝이 그리고 발목이 항상 차가웠다. 손을 더듬어 내려 여의 손을 찾아 쥐었다. 손바닥으로 손등을 감싸자 여의 손가락이 꼬물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검지 손가락을 꼭 잡아왔다. 가볍게 가로쥐더니 종종 손가락을 오므려 힘 있게 잡고는 했다. 그 행동에 웃음이 마른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지만 둘 다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어제 늦게까지 영화를 보다 잔 탓인지 정오를 넘긴 것이 분명한데도 쉬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동그란 여의 뒤통수에 코를 부비며 숨을 들이 내쉬어 본다. 밤사이 날아간 샴푸 향을 뒤로 달달한 살 내음이 났다. 덜 말린 채로 잠들어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어린애처럼 잠투정을 부린다. 몸을 비틀어 밤새 웅크리고 있던 팔을 이불 밖으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다가 얼른 다시 이불 안으로 팔을 넣는다.
"추워."
"추워?"
"..응."
"밤새 눈 많이 왔대.“
묻는 말에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고개를 느리게 주억거리며 양손을 모아 쥐더니 뺨 아래 갖다 댄다. 그리고는 다시 잠을 청한다. 눈이 얼마나 왔는지도 확인하고 차에 쌓인 눈도 치워야하는데 이불 밖으로 나가기가 싫었다. 옆에 누운 여는 더더욱 그랬다. 영화 보러가자며. 뺨을 살짝 누르며 묻자 응, 알아. 대답만 하고는 눈도 뜨질 않는다. 오늘은 극장에 영화를 보러가기로 했었다. 물론, 너무 춥지 않은 날씨가 조건으로 따라붙었지만 말이다. 밤사이 눈이 많이 내렸다면 그냥 지금처럼 몸에 남은 노곤함을 친구삼아 더 잠을 청할지도 몰랐다. 일어날 생각이 도통 없어 보이는 여를 끌어안다말고 문득 세탁소에 들려야하는 일이 생각났다. 드라이클리닝 맡긴 것들이 잔뜩 있었다. 회사에 입고나갈 흰 정장 셔츠, 여가 최근에 산 감색 코트 한 벌 그리고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핫도그를 사 먹다 소매 끝에 케찹이 묻었다며 울상이 되어 맡긴 흰 패딩도 한 벌 있었다. 이불 아래로 열 개의 발가락이 꼬물거리는 게 느껴졌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여는 침대 시트에 발등을, 발가락을 부비고 있었다.
여는 혼자 들리지 않는 입속말을 하더니 몸을 돌려 이번엔 마주 본 채로 다시 한 번 품을 파고들었다. 목덜미 아래로 머리칼이 닿아왔다. 가슴팍에 뺨을 부비며 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손끝에 닿은 파자마 옷깃을 잡더니 이내 다시 잠에 빠져든다. 머리를 쓰다듬다 가만히 잠든 얼굴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서 눈꺼풀, 이마, 그리고 콧대 위와 양쪽 두 뺨에도 입을 맞춰본다. 여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자?"
"응, 자."
눈 한 번 뜨지 않고 입술만 가늘게 떼며 대답을 한다. 저도 대답해놓고 웃겼는지 작게 웃는다. 그리고 손을 포개어 제 몸 위에 올려두고 가볍게 다독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 줘. 잠투정부리는 어린애가 되어 토닥여 달라는 것이었다. 등을 천천히 두드려주기 시작하자 포개었던 손에서 슬그머니 제 손만 빼내어 이불 안으로 쏙 넣는다. 토닥이는 손길이 좋은 듯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여는 만족스러운 듯 목울대를 울렸다.
"더 잘 거야?"
"아니."
"뭐가 아니야, 이러다 다시 잠들겠네."
"안 잘 거야."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얄미운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누르자 못마땅한 울음소리를 낸다. 손을 떼 내며 입가에 입을 맞춰주자 밤사이 자라난 작은 수염이 따갑다고 유난을 떨었다. 일부러 턱에 힘을 주어 뺨을 누르자 품 안에 갇힌 마른 몸이 두 팔을 휘적거린다. 아파. 따가워. 찌푸린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달래듯 어루만지다 눈도 못 뜨고 투덜거리는 얼굴이 우스워 뺨을 살짝 물었다. 방금 전보다 더 짜증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진짜 아파. 살살 엄지로 뺨을 쓸어주며 다시 품에 보듬는다. 미안, 아픈지 몰랐지. 그걸 왜 몰라. 서러움이 잔뜩 묻어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등을 두드려주자 너 밉다며 하소연을 시작한다. 원두가 다 떨어져서 모닝커피를 마실 수가 없다. 배가 고프다. 졸리다. 춥다. 마트에 가야한다. 나간 김에 점심을 먹자. 주말이니까 마트 열었는지 미리 확인해라. 저녁에 널어놓은 수건을 개켜야한다. 세탁소에서 옷도 찾고 분리수거도 밀렸다. 잔소리는 1절이 좋은데 자꾸만 길어진다. 그러다 말이 뚝 끊겼다.
"손, 또 멈췄다."
"이것도 일이야, 팔 아파."
"엄살은."
"투정은."
어느 샌가 손을 멈춘 채로 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가만히 끌어안은 채 올려두었던 손을 다시 움직여 몸을 토닥이자 표정을 풀고 눈을 감는다. 신아. 가만히 내 이름을 부르다 마른 입술을 오물거린다. 아니, 입맛을 다신다는 게 더 정확했다.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춥다면서,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먹고 싶은데."
"집에 아이스크림 없어. 먹으려면 나가야 돼."
“..그건 귀찮은데.”
추위를 뚫고서라도 아이스크림을 사러갈 기세가 눈이 잔뜩 온 밖에 나가야된다는 말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빠르게 가라앉는다. 기지개를 켜는 듯 하더니 팔을 뻗어 몸을 끌어안고는 슬쩍 몸 위로 올라와 앉는다. 영화관은 다음에 가자. 추워서 귀찮아. 요 앞에 분식집에서 떡볶이랑 너 좋아하는 순대랑 간 많이 달라고 해서 포장해 오자. 찐만두도 1인분 사고 빵집 들려서 바게트랑 생크림도 사오자. 나 아메리카노도 마시고 싶어. 따뜻한 걸로. 딸기도 한 팩 하자. 귤도 작은 망에 담은 걸로 사고. 응? 신아, 위에 올라탄 채로 몸을 수그려 안겨든다. 커다란 고양이가 따로 없다. 따끈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불쑥 말을 내뱉었다.
"너 그거 다 못 먹어."
"먹을 수 있는데."
"못 먹어. 저번에도 딸기 잔뜩 올라간 요거트 스무디 겨우 하나 먹고는 배부르다고 같이 산 빵도 못 먹었잖아."
"내가 언제."
"저번 주 수요일."
곧 죽어도 안 지려는 성미인지라 말꼬리를 자꾸 잡고 늘어지자 분에 못 이겨 이불을 제 머리 끝까지 덮어버린다. 하얀 침대보 위로 밤새 까치집 지어진 머리칼이 삐죽 빠져나와있다. 여는 한참을 이불 안에서 잔뜩 몸을 베베 꼬더니 그대로 옆구리로 미끄러져 내려가 침대 시트 위에 온몸을 뒤척였다. 침대 정리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인데 여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밀려올라오는 시트가 느껴져 곤란했다. 먹으러 가자. 응? 콧소리까지 내며 낑낑거린다. 혹시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데 동갑이라고 그 동안 날 속여 온 건 아닐까싶다.
"먹으러 가자."
"진짜?"
"봐서."
이불 밖으로 얼굴을 쏙 내밀고 화색이 돌던 뺨이 좋다 말았다는 얼굴이 되어버린다. 이불 사이로 슬금슬금 기어 나와서는 품에 가까이 다가와 등을 기대온다. 서로의 체온이 닿아있어 맞닿은 숨도, 이불 안도 온기가 가득하다. 예매한 영화 보고 싶다 했잖아. 다음에 보면 돼. 꼭 보고 싶으면 내일 나 퇴근하고 와서 볼까? 피곤해서 안 돼. 그리고 갑자기 야근하면 어쩌려고. 저번에도 같이 저녁 먹을 수 있다고 해서 한 상 가득 차려놨는데 회식 잡혀서 못 들어왔잖아. 맞는 말만 콕 집어 얘기하니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혼자 밀린 장을 보고 느린 손으로 음식 하느라 남들보다 두 배는 더 걸려서 준비했을 저녁이었을 텐데 그 얘기만 나오면 미안한 마음에 목구멍에 뭐가 턱 걸린 기분이었다. 뒤통수에 입술을 꾹꾹 누르자 헤실 거리며 몸을 돌리더니 마주 웃어온다.
“손톱 잘라야겠다.”
“응?”
“손톱, 벌써 이만큼 자랐네.”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어 잡은 채로 손가락 마디에 입을 맞추다 하얀 반달손톱 끝을 엄지로 문지르며 귓가에 입을 갖다 대자 여는 어린아이같이 웃음을 터트린다. 이런 주말도 나쁘지 않았다. 굳이 특별한 외출하지 않아도 등허리가 아플 때까지 늘어지게 침대에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애정 어린 말들을 나누는 것도 즐거웠다. 회사에 잡혀있느라 하루에 몇 시간 밖에 못 보는 얼굴을 맘껏 보는 것도 좋았다. 수염 때문에 따갑다고 피하는 얼굴을 잡아 입을 맞춘다. 여기 있구나, 네가 내 곁에 그리고 내가 네 곁에.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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