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기억이, 범람했다.
현재를 덮친 기억에 나는 울었다.
울 듯 웃으며 나는 깊게 침잠했다.
나는 죄인이다.
용서라는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죄인이다.
001. 김신 눈에 들이차는 색은 전부 무채색이었다. 너를 만나기 전에 나의 색은, 온통 바래있었다.
“저승사자?”
온통 하얗고, 입술이 붉은 사내를 처음 본 순간 김신이 떠올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짙은 회색이었다. 명계의 차가운 기운을 품고 저를 향해 붉은 입술을 달싹이는 저승사자는 그랬다. 김신은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머릿속에서는 저승사자의 색깔을 보이는 대로 인지했지만 정작 김신이 느끼는 사내의 색은 짙은 회색조였다. 김신은 멀거니 시야에 들어차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머리에 씌워진 검은 모자는 사자의 분위기를 한층 더 어둡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와 동시에 김신은 그가 흐려지는 환상을 보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만나는 사내에게 느끼는 감정 치고는 그 소용돌이는 격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가 당황할만큼. 그래서 김신은 자신이 느끼는 것과는 다르게 사내에게 꽤나 잘 어울리는 모습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매우 상스러운 갓을 썼군.”
사내가 제 중얼거림에 성을 내듯 모자를 치켜 올리는 것을 마저 담아내며 김신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짧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다. 죽지 못하는 김신에게 저승사자란 원망스러운 존재였다. 누구라도 제 명부를 받아, 제 이름을 부르며, 죽음의 안식을 건내주길 바라왔지만 누구도 제게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김신은 저승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랬었다.
다시 만난 사내는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고 제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이미 계약을 마친 사내는 집을 나가는 대신 덕화를 데려가도 상관없다며 밉살스럽게 중얼거렸다. 꽤 어린애 같은 말싸움을 계속하던 와중에 김신은 잊고 있었던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떠올렸다. 인간들과 연을 맺을 때면 언제나 마음 한 켠에 남아있던 불안감을 그 사내에게선 느끼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오래 살아왔고, 그만큼이나 오래 살 남자였기 때문에. 그래서 김신은 사자와의 동거를 수락했다. 순간, 회색조로 보이던 사내의 분위기에 옅은 다채로움이 담겼다. 예뻤다. 남자에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형용사였으나, 그 순간 김신이 느낀 감정은 그것이었다. 저승사자에게 감돌 수 없는 생명이 깃드는, 그런 느낌.
“뭐야, 도깨비.”
그런 제가 이상했던지 사자는 제 앞에서 손을 휘휘 저었다. 멍해졌던 김신은 눈앞에 아른거리는 하얀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같아지기 시작했다. 하얗다고 인지하면서도, 붉다고 인지하면서도 정작 느끼는 것은 회색조이던 사자의 모든 것이 제 색을 입고 움직였다. 그것은, 신비로웠다. 색들이 온통 빛나며 제 존재를 외쳤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 색을 찾은 저승사자의 얼굴이, 그래. 어여뻤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김신은 그 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황급히 일어나 도망쳤다.
001. 저승사자 너를 중심으로 색이 번졌다. 찬란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순간들이었다. 저승사자는 망자가 떠난 후 찻잔을 천천히 닦으며 오늘 하루를 떠올려 보았다. 완벽하게 평범했다. 지독하다고 느낄만큼 변화 없는 삶이었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다. 예쁘게 닦인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사자는 제 가슴께를 약하게 쥐었다. 아침부터 사정없이 뛰던 심장의 고동은 잦아들어 있었다. 사자가 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동소리였다. 뛸 리가 없는데. 사자는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이런 식으로 알리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사자는 말을 잃었다.
“...도깨비?”
반쯤 억눌린 음성이 내뱉어졌다. 동시에, 온통 회색이던 세상이 색깔을 입었다. 사자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눈에 들어오는 세상이 빛났다. 세상의 중심엔 도깨비, 그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삐딱한 웃음을 입게 걸고 사내는 제 모자가 상스럽다 중얼거렸다. 온통 찬란함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사자는 울컥해 모자를 슬 들어올렸다. 그것이 마지막, 일거라고 생각했다. 도깨비와 접점이 생길 일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 집 살아?”
분에 넘치리만치 좋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터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집은 사자가 그 터를 눈에 담았던 순간부터 탐내던 집이었다. 매번 잠에 들면 누군가가 밑으로 잡아끄는 악몽을 꾸는 그가 그 집 주변을 오래 맴돌았다는 것만으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깊은 잠을 갈구하던 사자는 그 집에 집착했다. 그리고 임대료를 다 모은 순간 집에 질렀다. 그런 집을, 탐탁찮은 존재가 있다 해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에겐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도깨비터라서 그렇게 기분이 좋았던가. 사자는 작게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서로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002. 김신 스치듯 다가온 인연이 온통 저를 물들였다. 울긋불긋, 어여쁘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사내와 함께 사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적적하던 집은 생기를 머금었다 말할 수 없는 사내가 들어옴과 동시에 나름의 활기를 머금었다. 저는 일절 손대지 않는 집안일을 하는 것도, 따로 일이 없으면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이 앉아서 식사하는 것도, 그 상스러운 것들을 모아 만든 주스에 빨대를 꽂아 입에 물고 얌전히 쇼파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는 저승사자도 전부. 익숙하게 일상에 스며들어가는 장면들이었다. 김신은 문득 사자의 입술에 시선을 옮겼다. 유독 붉은 채도를 머금고 있는 그 입술. 시선을 잡아끄는 붉음. 손을 뻗어 만져보면 피가 묻어나올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어색하게 거둬들이곤 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김신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제 쇄골에 새겨져 있는, 흐릿해져 있던 주군의 이름이 점점 짙어지는 것에 반쯤은 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 목을 가릴 수 있는 목티를 즐겨 입었다. 이름만으로 되찾아질 만큼 허술하게 잊혀진 기억이 아니라는 걸 알건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기억을 되찾으면 그와 저의 관계는 파국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틀어진 운명은 제가 아직 틀어진 그 상태로 있는 한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와 여는 운명적인 상대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관계였다. 하지만 나약하던 주군은 귀를 막고 머리를 어지럽히는 간신의 감언이설에 집중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키워진 그의 주군은, 그 간신을 내치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틀어졌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만큼.
“....”
김신은 제가 무의식적으로 푸른 불길을 온몸에 띄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원망하지 않으려 해도 그가 원망스러웠다. 저를 믿지 못한 제 주군이. 끝내 저를 죽인 주군이. 신의 배려로, 저주로 다시 돌아와 찾아갔을 땐 이미 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아픈 사람이. 하지만 언제나 강렬할 것만 같았던 원망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퇴색되고 흩어졌다. 이제 남은 건 그리움이었다. 그 간신을 베지 못했다는 원통함이었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김신은 왕여가 아팠다.
002. 저승사자 신(神)이시여, 죽음을 갈망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사자는 이번 달의 명부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찾던 이름은 없었다. 김신. 그 짧고 굵은 두 글자는 이번 달에도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자는 기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꼈다. 어쩌다 보니 함께 살게 된 도깨비는 오래도록 살아왔다 했다. 제 곁의 소중한 이들이 하나씩 떠나가며, 그 아픔을 오롯하게 기억하며 살아온 생이라 말했다. 길고도 긴 삶이었다. 기억을 잃은 저로서는 알 수 없을 고독감이었다. 가끔 도깨비는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그 때의 그는 마치 늙은 고목나무처럼 오래된 냄새를 풍겼다. 그에게 있어서 기억을 잃은 채 망자를 인도하는 것이 벌이라면 김신, 그 자는 살아있는 것이 벌이었다.
“...모든 것을 잊지 못하는 자와 모든 것을 잊은 자라.”
사자는 문득 떠오른 말을 내뱉고는 이름을 적으려던 손길을 멈추었다. 중간에 멈춰진 잉크가 작고 짙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반쯤 적어 내려져 가진 그의 이름 란에는 김차, 까지 적혀 있었다. 김 차사.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이름. 김 차사. 그 이름에는 제가 있었다. 동시에 제가 없었다. 김 차사라는 이름은 빌린 이름이다. 그 이름은 텅 빈 자신을 비추고 있었으나,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제가 잃어버린 제 자신이 없었다. 사자는 망연한 얼굴로 웃었다. 사자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다. 무슨 죄인지는 모르나, 기억을 잊은 것 또한 신의 뜻이리라고 그는 믿었다.
“어쩌면,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죄일지도.”
상실을 겪은 자는 그 상실을 딛고 이겨내며 성장한다. 기억이 없는 저는 상실을 경험할 기회 또한 전무했다. 일을 함께 하는 동료들은 같은 처지이기에 동질감을 느꼈지만, 아마 그들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사자는 슬퍼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본인이 직접 선택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을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사자는 이름을 마저 적어내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어쩌면 도깨비와 한 집에 살게 된 것도, 그래서 인간과 관계를 맺게 된 것도. 신이 제게 내린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제 긴 생에 몇 오지 않을, 어쩌면 마지막 기회.
사자는 무릎을 끌어당기며 몸을 웅크렸다. 제 발목에 새겨져 있는 이름을 어루만졌다. 김신, 그자의 이름을 쓸어내렸다. 텅 비어 있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름의 상대가 그였다. 그의 이름을 듣고 그토록 놀랐던 이유는 제가 유일하게 가졌던 것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자는 차마 그를 욕심낼 수 없었다. 오래도록 지쳐있는 도깨비는 죽음을 소망했다. 발목을 잡을 순 없었다. 삶의 이유가 되게 만들 수 없었다. 그토록 지쳐있는 사내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자는 도깨비를 잡지 않았다. 부러 양말을 꼭꼭 신고 다니며 사내의 이름을 숨겼다. 족쇄처럼 느껴지리라 생각했다. 그랬다.
사자는 도깨비가 아팠다.
003. 왕여 강렬한 생각은 그에게서 숨길 수 없었다. 제어되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되찾은 기억 앞에 눈물이 흘렀다. 왕여는 그를 죽였던 절에서, 그 때의 자신이 서있던 그 자리에 발을 옮겼다. 눈앞이 아련하게 흐렸다. 눈앞의 네가 아련히 흐렸다. 나는 너의 증오의 원천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운명이었다. 참으로 잔혹하지 않은가. 왕여는 작게 실소했다. 미친 웃음 뒤에 숨겨진 작은 진심은 닳고 문드러져 빛을 잃었다. 여는 제게 새겨진 이름을 보여주지 않음에 안도했다. 만약 그걸 빌미로 사랑을 구걸했더라면, 아마 더 한 경멸을 받았겠지. 이것으로 깔끔하게, 관계는 끝났다. 비틀린 운명은 바뀌지 못했다. 김신의 시간은 그 때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있으니.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하더라도 파국을 면하지 못하리라. 왕여는 망연해진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그랬던가. 내가, 왕여였던가. 기억 없이 남은 감정은, 내가 왕여인걸 잊지 말라는. 스스로 주는 벌이었던 걸까. 역시, 나는 가장 나쁜 기억인가 보다. 나의 장군, 나의 충신, 김신, 그자에게서.’
그 때, 머리를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 목소리 들리지.’
여는 온 몸을 굳히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때, 그 순간처럼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는 제 충신이 있었다. 이번 생에 이어지지 못할 제 연인이 있었다.
‘나도 네 목소리가 다 들리거든. 아주 선연히.’
분노를 품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여는 텅 빈 웃음을 지었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열렬히 바라 마지않았던 기억이, 이제는 다시 잊고 싶을만큼 괴롭다. 너와 나의 비틀린 운명이 아프다.
그때와는 다르게 김신을 가로막는 죽음은 아무것도 없었다. 김신은 쉽게 제게 다다라 제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일순, 왕여는 가슴에 칼이 박힌 김신을 보았다. 제가 내린 검이 그 오랜 세월동안 김신의 심장과 함께 약동하며 살았다. 오래도록 아팠으리라. 사내가 하염없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상장군 김신, 폐하를 뵙습니다.”
아프다. 네 증오가, 네 오랜 삶이, 네 아픔이.
003. 김신 너의 목소리는 번진 수채화 같았다. 외로움에 잠겨 있는 그 목소리가 아팠다.
“내가, 검을 내렸어. 너에게.”
김신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라고 했다. 김신은 뒤를 돌았다. 기억을 되찾은 제 주군은 울고 있었다.
“내가 죽였어. 내가 다 죽였어.”
그래. 너는 모두를 죽이고 너까지 죽였다. 마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재가 되어버린 지귀마냥.
“기억이, 났어. 내가, ....왕여였어.”
죽을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사자의 앞에 서서 도깨비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왕여. 제 주군. 어느 순간부터 겹쳐보이던 얼굴을 통해 확신했다. 제 앞에 서 있는 저승사자는, 모든 것을 잃은 회색조의 사내는, 왕여다. 모든 것의 위에 서있던 사내는 모든 것을 잃고 텅 빈 채로 제게 왔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살아난 제가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보내야 했던 제 왕이다. 울고 있는 저 얼굴은 제가 보지 못했던 주군의 자란 얼굴이다. 김신은 눈시울을 붉히며 왕여의 멱살을 잡아챘다. 부서지고 흩어졌다 생각했다. 그래서 감히 그리움만 남았다 제 감정을 단정지었다. ...아니었다. 기억을 되찾은 왕여에게 김신은 화낼 수 있었다. 닿지 못했던 분노와 억울함을 내비칠 수 있었다. 그 가능성 하나에, 부서졌다 생각했던 잠자던 감정이 깨어나 온통 원통하게 울었다. 내뱉지 못했던 언어들이 목구멍을 긁으며 새어나왔다.
“그래, 너라니까 네가 그랬어. 네가 다 죽였어. 죽이다 죽이다 너는! ...너까지 죽였어.”
너의 죽음이 아팠다. 해주지 못했던 말이 입 안에 맴돌았다. 그 많은 죽음을 딛고 너에게 다가가서 하고 싶었던 말을, 늦게라도 전하고 싶었는데. 끝내 전하지 못했던 말이 부서져 내렸다. 그래서 김신은 그 잔재들을 삼켰다. 부러 독한 말을 내뱉었다.
“너는 네 여인도, 네 충신도, 네 고려도, 너조차도 단 하나도 지키지 못했어. 선이가, 그 어린 내 누이가 목숨으로 지킨 너였어. 넌 살았어야 했어. 끝까지 살아남아서 내 칼에 죽었어야 했어. 그래서 네가 내게 씌운 역모라는 그 죄를! 넌 죽음으로 증명했어야 했다.”
눈물에 젖어있는 얼굴이 아팠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너의 그 모든 색채가. 빛을 잃고 다시 회색빛으로 침잠하는 너의 모습이. 과거의 추억에 먹혀 아파하는 나의 주군이. 울고 있는 너의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그럼에도 일렁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오래도록 품어왔고, 그 증오에 먹혀 죽지 않기 위해 외면해왔던 감정이 자극을 받아 이리저리 날뛰었다. 김신은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제 주군은,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004. 왕여
분노와 염려를 담아, 검을 내릴 테니, 박중헌을 베어라.
그날.
그날 넌,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아갔던 거야? 그 자리가, 무덤이 될 걸 다 알면서.
그렇게까지 해서, 넌 무슨 말을.
004. 김신
황제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나는 결국 닿지 못했어. 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나는 나아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
전하지 못했던 말을 전하러.
선황폐하께선, 널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고.
너의 이복형이었던 선황제에게, 너의 정인이었던, 너의 고려를 지켰던 나에게, 넌 사랑받았다고.
그러니 한 말씀만 내리라고.
회색빛 기억이, 범람했다.
이번 생의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다음 생을 기대할 것이다.
다음 생에도 나는 너를 보면 온통 만발하는 색을 볼 것이다.
나의 영혼에 새겨진 이름은 다음 생의 몸에도 따라붙으리라.
그것으로 나는 너를 찾을 것이다.
너를 찾아, 너를 품에 안고.
나는 환하게 웃으리라.
모든 아픔을 털어버린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