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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bin Classic

 

 

나는 가끔 수상한 세계 속의 수상한 인간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젖어들곤 한다.

 

녀석을 떠나 용인시에 정착한 지 일 년, 조용한 동네로 자리를 잡은 나는 여전히 그 동네의 뜬구름 같은 존재였다. 빵집, 화원, 비디오 가게, 헌책방. 이 네 곳만 전전하고, 때로는 생필품을 사러 마트로 향하고. 원체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성격 탓에 행동 반경이 좁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교류도 끊겼다. 녀석과 함께할 땐 최소한의 교류를 위해 노력했었던 기억도 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쓸모없다 못해 스스로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녀석이 없는 세계엔 수상한 인간들 뿐이니까. 나는 오늘도 낡은 비디오 가게에 들러, 한 켠을 켜켜이 채우기 시작한 DVD들을 찬찬히 둘러 보았다.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 구매한 싸구려 디비디 플레이어의 성능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간도 1, 2가 나란히 꽂힌 누아르 디비디 코너를 차근차근 뜯어보다, 늘 그렇듯이 무간도 1을 선택한다. 녀석은 항상 무간도 2가 희대의 졸작이라며 혀를 찼었다. 괜히 목구멍이 텁텁하게 아려왔다. 나는 연신 부채를 파닥이는 할아버지를 향해 디비디를 건넸다.

 

 

 

“이거 주세요.”

“학생.”

“네?”

“다른 영화는 안 봐? 이거 너무 자주 빠진다고 동네 사람들이 뭐라 하더라고.”

“아, 그랬나요.”

“이 동네가 워낙 작잖아. 다른 영화 추천해 주랴?”

“아뇨, 다른 거 제가 찾아볼게요.”

 

 

 

김신이랑 봤던 영화가 어떤 거였더라. 무간도 말고 뭘 봤었지. 녀석은 하나에 빠지면 무섭도록 몰입하는 스타일이라, 어떤 것을 시작할 때 항상 신중에 신중을 기여하곤 했다. 지금의 내가 디비디 앞에서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듯이.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가, 김신이 좋아하던 것들이 가끔은 이전처럼 생생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럼 난 또 한도 끝도 없이 우울해진다. 우울함에 푹푹 절어들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 더 깊어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했다. 화제를 억지로 전환해서라도 돌리고 싶은 것은 늘 도처에 존재한다. 김신이 될 때도 있고, 우유부단한 나 자신일 때도 있고, 그게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둘의 관계일 때도 있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손을 더듬거려 닿은 박스를 움켜 쥐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빨리 이 가게에서 나가야 했다. 스스로 서글픔에 젖어 동정으로 위안하기 전에.

 

 

 

“얼마예요?”

“오천 원.”

 

 

 

후다닥 뛰어나온 뒤, 숨을 고르며 잡은 디비디를 확인했다. 나는 곧 자잘하게 터진 입술을 깨물며 짜증을 부렸다. 땀에 절어든 몸이 찝찝한 것도 가뜩이나 원망스러운데, 영화는 난생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짜증이 날 맞이했다. 발목까지 땀에 절어버린 탓에, 후끈후끈한 발찌를 풀어 손에 쥔 채로 집에 걸어왔다. 널부러진 채로 디비디 플레이어에 CD를 우겨 넣고, 냉동실로 걸어가 고개를 처박았다.

 

잊어, 다 잊어. 더 나쁜 걸로 다 잊어. 우습게 생긴 플레이어가 입을 벌리고 말을 쏟아내는 것 같다. 괜스레 눈가가 찝찝했다. 땀이 많이 나서 그렇겠지. 나는 애써 자위하며 달아오른 눈가를 비볐다. 거칠게 밀어대도 여과 없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뜨끈뜨끈한 눈가를 축축하게 적셨다. 나는 흐려진 눈으로 덜컥거리는 디비디 플레이어를 거칠게 내려쳤다. 쾅. 큰 소리가 터짐과 동시에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엉엉 울부짖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딘가에서 당장 김신이 나타나, 헛짓거리 말라고 타박할 것 같았다.

 

벌써 팔 년이다. 김신의 얼굴을 못 본 지 팔 년이 됐다. 나는 서른일곱의 여름을 힘겹게 나고 있었고, 여전히 학생 소리를 들으며, <마빈 클래식> 이라는 바보 같은 디비디를 빌려 틀어 놓은 채로 바보처럼 울고 있다. 그럼, 이제 서른여덟이 된 김신은 어떨까.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아니면 벌써 어린 자식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나처럼 혼자 지내고 있을까. 무엇을 생각해도 김신은 나처럼 외로워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날 덮쳤고, 나는 그 확신에 기인해 지친 몸을 뉘인 채로 계속해서 흐려지는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싸구려 퓨전 클래식과, 훌쩍이는 내 울음소리와, 시퍼런 하늘까지. 녀석이 봤다면 싸구려 감성 팔이라고 혀를 찼을 광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참고 참던 것이 한꺼번에 터진 날은, 하늘이 푸르뎅뎅하게 젖어 누런 석양과 섞일 때까지 세상 모르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녀석이 많이 보고 싶었다. 지금 보고 싶다 울면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허탈한 생각에 울음을 터트리는 와중에도 실없이 웃음을 지었다. 몰골이 많이 우습겠지. 재생되고 있는 영화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음악과, 격양된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I’m a mistake.]

난 불량품이야.

[I feel like such a disappointment.]

난 실패작이야.

[I lay in bed, for hours in the dark, at night, thinking about every possible thing I fucked up in my life.]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내 인생에서 내가 망쳐버린 온갖 것들을 생각하며 몇 시간을 보내지.

 

 

남자는 바보 같았다. 그는 한참 심각한 표정으로 울부짖는 여자를 바라보다가, 짧은 영어를 읊조렸다. 라티노 계열의 사람이었는지, 말하는 종종 미묘한 억양의 영어를 사용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나는 남자의 말을 따라 중얼중얼 읊조리다, 곧 그마저도 지쳐 널부러졌다. 화면을 계속 보고 있자니 눈이 침침해, 시퍼렇게 젖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적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축축한 탓에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를 흐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생각하는 것조차 지쳤다. 사람이 사람을 잊고 얼굴이 가물가물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고작해야 일 년 정도라는데, 나는 벌써 팔 년째다. 생각할 때마다 머릿속이고 얼굴이고 죄 눈물로 어룽져 보기 꼴사나울 정도였다. 김신은, 잊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녀석은 죄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남한테 잘하고, 장난도 잘 치고, 친화력도 좋고, 술도 좋아하고, 담배도 많이 피우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었다.

 

조금도 평범하지 않았던 내가 너무 평범한 인간을 만난 탓이다. 그래서 더 잊지 못하고 이렇게 도처에서 배회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내도록 시야를 꽉꽉 틀어막던 무색무취의 영화를 멈췄다. 순식간에 까맣게 변한 화면 속엔 내가 보였다. 영화를 끈 기점으로 사방천지가 무섭도록 조용해졌다.

 

연원마을은 배드타운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구성구 내에서도 특출나게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도시인 이 곳은, 조용한 도시를 찾아 도피하던 나에게 꼭 들어맞는 곳이었다. 초등학생이 귀가하는 너댓 시쯤엔 세상이 적막하다 느낄 정도로 세상이 조용해졌다. 귀가 먹은 건가 싶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한참 잔숨만 꿀꺽꿀꺽 삼켜내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차게 식힌 아이스팩이 눈가를 덮어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을 때쯤, 나는 손을 더듬어 잡히는 마빈 클래식의 껍데기를 쥔 채로 코를 훌쩍였다.

 

다음엔 다시 무간도를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Lapis Blue

 

 

녀석과의 연애 기간은 생각 외로 길지 않았다.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연애를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남들처럼 죽자고 싸우면서 애정이 싹트는 관계도 아니었다. 굉장히 뜨뜻미지근했다. 녀석은 날 처음 만났을 때 극단에 몸을 담은 신인 배우였고, 나는 이제 막 각본에 불을 켜고 허덕이기 시작한 신인 작가였다. 접점이 있었기에 자연스레 물꼬를 텄고, 어려운 형편에 서로 마음 동하는 것은 콜타르에 불 당겨 터트리는 것 만큼이나 빨랐다. 녀석이나 나나, 이상보다 현실에 마음이 동한 것이다. 서로 어려웠던 형편, 빛 보지 못한 서로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동질감, 더불어서 공공연히 맞아떨어지는 취향까지. 그 취향은 기성 이십 대 남자들이라면 으레 마음이 동하는 요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감정에 취해 있던 우리 둘은 아마 스스로 시야를 덮었던 것 같다. 녀석과 나만의 동질감. 녀석과 나만의 것. 오롯이 우리 둘만이 영위하는 특별한 것들.

 

우린 언제까지 같이 있을 것 같아? 내가 질문했을 때, 녀석은 터무니없는 질문이라는 듯 한참을 웃다 대답했다. 당시 내가 작업했던 각본인 라피스 블루의 한 구절이었다.

 

 

 

“이 유해한 감정에 의연해지기 전까지 계속.”

 

 

 

그래, 이 유해한 감정. 이 감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지라, 누군가에겐 비대하게 기름이 낀 지방층처럼 불어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뙤약볕 아래 놓인 아이스팩처럼 흐물흐물 옅어지기도 한다. 내가 지극히 전자에 속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8년에 걸쳐 깨닫고 있는 지금은, 전처럼 의연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많이 표현하려 애쓴다. 녀석이 없는 곳에서 많이 울고, 녀석이 없는 곳에서 많이 그리워하고, 녀석이 없는 곳에서 하릴없이 의욕을 잃고.

 

만남이 열성적이지 않았기에, 헤어짐 또한 정적으로 이뤄졌다. 한껏 멋쩍은 얼굴로 술자리에서 연거푸 잔을 비우던 녀석은, 곧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별로. 생각만큼 연애가 재밌지 않다. 그렇지 않냐, 여야.

 

 

 

“그러네.”

 

 

 

생각만큼 재밌지 않네. 나는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속에 참이슬 오리지널을 꾸역꾸역 처넣었고, 그 다음 날 사지육신이 뒤틀리는 숙취에 절어 종일 바닥을 기어다녔다. 물론, 그 이후로 김신에게선 단 한 차례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얄궂게도 장난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들이 모조리 현실이 됐다.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잔인하게 끊어낸 이별을 종식시키는 마지막 장이었다.

 

현실감이 없어 망연히 글만 쓰기를 삼 개월, 녀석이 독립영화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어렴풋이 들려왔고, 곧 얼마 가지 않아 녀석의 이름이 크레딧에 달린 영화가 개봉했으며, 또 얼마 가지 않아 녀석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영화가 등장했다. 속속들이 커져만 가는 녀석의 공허함을 그 당시에 알아챘더라면, 지금보다 조금 덜 괴롭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세울 것은 자존심이요, 더 나아가 감정은 묻고 묻어야 속이 풀리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은, 녀석이 나온 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연락이 오지 않으니까. 날 좋아하지 않는 이에게 갖는 관심은 지대한 미련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었다. 끊임없이 갉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끊임없이.

 

 

 

“김신은 잘 지내?”

“니가 알지, 우리가 알 건 아니잖아.”

“나 요즘 연락 안 하는데.”

“너랑은 연락할 줄 알았는데. 영화 찍기 전날까지 니 각본 가지고 옥신각신 했잖아. 판권 이런 식으로 넘겨도 되는 거냐고. 신인 상대로 횡포 부리는 거 아니냐면서. 그래서 결국 주연 자리 내놓은 거라던데.”

“김신이?”

“어, 김신이.”

 

 

 

그러더니 너한테도 연락 안 했구나, 미련한 새끼가. 울려 퍼지는 친구의 목소리에 생전 느낀 적 없던 두통으로 며칠을 앓았고, 꿈결 같은 소리에서 깨어날 때쯤엔 모두가 입을 모아 외치고 있었다. 잘잘못 가릴 시간이 어디 있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 글에 매달리던 놈인데. 왜 그렇게 피해? 잘못했어, 혹시?

 

잘못한 건 없고, 김신이 좋아한 건 내가 아니라 내 글이니까.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꾸역꾸역 삼키는 와중에도 기억을 치대는 미련 때문에 몇 번이고 이를 악물었다. 당연하게도, 라피스 블루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고 끝났다. 백오십만 원을 주고 판권을 넘겼던 내 각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품으로 돌아왔다. 어떤 모종의 계약이 오갔는지 모르는 건 그 세계에서 오롯이 나 혼자였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날 중심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만 모르게 이루어지는 이상한 세계.

 

 

 

“민재한텐 연락하는 것 같더라. 잘 지낸대. 그걸로 됐지, 뭐.”

“응, 그래.”

 

 

 

그래야지.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정신만은 또렷해서, 그 당시 술에 절어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던 나는 또 어렴풋이 김신 생각을 했었다. 잘 지내면, 김신, 잘 지낸다면, 다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네가 없는 세계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고.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김신 네가 너무 보고 싶어지고 있다고.

 

 

 

 

 

Lapis Blue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잘도 흐른다. 내가 김신을 잃은 채로 흘려보낸 시간이 이렇게 늘어졌듯이.

 

평소처럼 텅 빈 눈으로 무간도를 보고, 벌건 대낮에 무드등을 켜 놓은 채로 자판을 두들기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생경한 번호여서 지나쳐도 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긴 부재에 지친 핸드폰이 울리는 것에 신기함을 느껴 받은 것이 문제였을까. 들려오는 통화 내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의 것인지라, 나도 모르게 어물거리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억지로 기억에 묻어 뒀던 기억이 또 물꼬를 트고 꾸역꾸역 밀려왔다. 급격하게 속이 울렁거린다. 나는 애써 입을 틀어막은 채로,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다. 몇 번을 반복해서 되뇌여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 투성이였다.

 

 

 

“그건 십 년이 다 된 시나리오고, 제가 기성 작가로 활동하기도 전에 썼던 작품이에요. 무산됐었고요. 근데 왜 이제 와서…….”

“그때 협업했던 배급사하고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야 연락을 드리게 된 거고요. 작가님 시나리오 자체는 아주 좋아요. 저희 측에서도 강경하게 밀고 나가는 분이 계셔서, 전원 찬성했었고요.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 저는…….”

 

 

 

좋은 기회가 밥 먹듯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내 생활이 그닥 동적인 것도 아닌데,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참을 어물거리다 미팅부터 시작해 보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나 스스로의 결단보다는, 지난 날의 기억에 머물러 있는 내 미련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잊을 준비를 이제야 시작한다. 팔 년에 걸쳐서 스스로를 갉아먹던 굴레에서, 이제야 벗어날 참이었다.

 

 

 

“네, 다음 주 목요일이요, 네, 알겠습니다.”

“작업을 원하시는 배우님도 함께 참석할 예정인데, 괜찮으세요? 저랑 면식이 좀 있어서, 전부터 이 시나리오에 되게 관심이 많으셨거든요.”

“네, 상관없어요. 저야 영광이죠.”

“그럼 긍정적으로 검토하셨다 생각하고,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길었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긴 시간이었다. 이제는 끊어낼 때도 됐지. 심장은 납덩이라도 얹은 듯이 꽉꽉 조여 왔지만, 더는 생각하기도 지쳤다. 생사도 불분명한 상대를 기억하는 일은 생각 외로 많은 리스크를 수반한다. 지금의 내가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온전히 나에게만 중요한 사실이다. 그간의 힘겨운 사실을 상기시키는 건 이번 작업이 마지막이다.

 

여적 혀끝에서 맴돌던 초콜릿을 깨물었다. 툭 터지며 튀어나오는 싸한 알코올 향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잠시나마 정신을 분산시키려 틀어 뒀던 무간도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대사가, 알싸하게 터진 초콜릿 사이로 까끌까끌하게 스며들었다.

 

 

 

[죽기 딱 좋은 날씨네.]

 

 

 

말마따나 죽기에도, 잊기에도 좋은 날씨였다.

 

 

 

***

 

 

 

미팅은 수월했다. 과거에 스쳤던 이들처럼 강압적이지도 않았고, 조정 과정 역시 무거움 없이 이뤄졌다. 재검토 과정에서 내 글이 눈에 띄었다는 말, 전체적인 흐름이 섬세해서 정통 멜로로 작중 분위기를 끌어도 되겠다는 말, 그리고…… 김신 역시 여기에 긍정적인 답변을 남겼다는 말.

 

그러니까, 이 편안한 자리가 당장이라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자리로 전환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오 분도 되지 않았다. 남의 입에서 들리는 그의 이름이 지나치게 생경해 속이 답답하게 짓눌린다. 설마, 설마. 불안함에 다리를 닥닥 떠는 와중에도 설마에 걸고 있는 기대치가 상당해서 더욱 피가 말랐다. 차라리 이름만 호명되는 거였다면, 그래서 내가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신이에요.”

“아, 오셨네요. 괜찮아요, 저희 측에서도 최종적으로 검수할 사안만 보고 있었던 거라서. 여기, 신 씨가 궁금해했던 작가님도 오셨어요.”

“…….”

 

 

 

근데 넌 왜 그렇게 생경한 눈이야.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데.

 

 

 

“아, 작가님이셨구나. 안녕하세요. 대본은 가장 먼저 받아서 읽었어요. 주연 꼭 맡고 싶더라고요.”

 

 

 

김신입니다. 기억 속 목소리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이다. 김신의 눈을 보는 순간 생각은 확고해졌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줄곧 벌렁거리던 심장이 끝내 터질 듯 쥐어짜였다.

 

 

 

“아.”

 

 

 

외마디 소리를 뱉으며 잠시 고개를 숙이자, 단박에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럴 때 대처하는 법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29년을 살아도, 37년을 살아도 마찬가지다. 당장 급박하게 아려 오는 속을 달랠 길이 없어 입술만 짓씹기를 반복하자, 내 어깨를 조심스레 다독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젠 환멸이 난다. 정말이지, 너는 뭘까, 정말로.

 

 

 

“괜찮으세요, 작가님?”

“네, 괜찮아요. 김신 씨라고 하셨죠.”

“네.”

“끝나고 잠깐 뵐 수 있을까요? 명색이 작가인데, 그래도 몇 가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김신이 날 위한 최소한의 처우로 택한 게 이런 거였다면, 난 꿈에서도 녀석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혹감이 설핏 스치는 녀석의 얼굴을 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눈가가 흐려졌다.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재회였다. 우연도 아니고, 필연도 아니고, 정말 딱, 신의 농간 같은 재회.

 

보이지도 않는 계약서 전문을 수십 번 훑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자리는 끝이 났다.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은 여적 얼굴에 스민 당혹감조차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한심하다. 당장 터질 것 같은 말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녀석을 마주했을 때, 그때서야 맥이 탁 풀렸다.

 

 

 

“너 뭐야.”

“오랜만이네.”

“너 뭐냐고.”

 

 

 

통 대답이 없다. 변명이라도 제대로 하라고 녀석을 흔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왜 이래, 왜. 왜 나한테 그래. 왜 죽어갈 참에 나타나서 사람 미치게 만들어. 왜 그랬어.

 

녀석이 침묵을 유지할수록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홧홧한 열기에 눈을 깜빡이기가 무섭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닦아낼 틈도 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터져나왔다. 꼴사나운 것도, 울적한 것도 다음 문제였다. 김신이 내 앞에 있다. 그렇게 미적미적 이별을 고했던 녀석이, 세상의 관록을 뒤집어 쓰고, 더 멀끔하게, 더 멋있게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아직도 판권 하나 따는 것에 목메여 사는 작가인데. 녀석을 보고 느끼는 애틋함보다 먼저 고개를 든 것은 애석하게도 부끄러움이었다. 녀석은 너무 커졌다. 내가 뒤집어쓰고 그리워하기엔 너무 극단적으로 커 버렸다. 누가 봐도 사랑할 수 있게, 그렇게 변해 버렸다. 그 사실이 한 번 더 내 속을 울컥울컥 쳐냈다.

 

 

 

“미안해.”

“하.”

“난 네가 다 잊은 줄 알았어.”

 

 

 

한참만에 녀석이 꺼낸 말은 단 두 마디였다. 뭐가 미안하고 뭐가 잊은 줄 알았다는 건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나는 온통 뿌연 시야 속에서도 넓직하게 드러난 녀석의 가슴팍을 쳤다. 퍽, 하는 소리가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미동조차 없었다. 세 번, 네 번을 연달아 치고 녀석이 뒤로 밀려난 뒤에야 말이 터졌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기 시작한 말은 한 번 튀어나오기 시작하니 끝도 없이 줄줄 새어나왔다. 막을 틈도 없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 가릴 틈조차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마지막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과거에 너무 오래 얽매여 있었던 거다. 그것도 혼자서. 정말 지독하게 혼자서.

 

 

 

“내가 뭘 잊어.”

“여야.”

“내가 뭘 어떻게 잊어. 나 아직도 무간도밖에 안 봐. 술은 참이슬 오리지널만 마시고, 초콜릿은 안톤버그만 먹고. 시나리오는 안 써. 너는 늘 내가 소설 쓸 때 제일 너다운 글 쓴다고 했었으니까. 라피스 블루? 그거 내가 무슨 마음으로 들고 나왔는지 알아? 지금 니가 보여주는 이 모습처럼 니가 잘 지낼 것 같길래. 근데 나 혼자 못 지내면, 그건 미련이 아니라 망령이잖아. 너무 꼴 사납고 싫어서 그랬어. 그래서 그 케케묵은 시나리오, 그거 어떻게 발굴했나 하는 의심 하나 안 품고 나왔어. 왜인 줄 알아? 잊으려고. 나도 너처럼 8년간 연락 한 통 안 하고도 잘 지내는 사람 좀 돼 보려고. 그거 잘하면 너도 잊을 수 있잖아. 이걸 계기로 난 다 끊어낼 생각이었어. 아예 다. 전부. 내가 알아서 괴로운 것 좀 나도 이제 잊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 나 이제 서른일곱이야. 너 처음 봤을 때 스물일곱이었는데, 그랬던 내가 이제 서른일곱이라고.”

“미안해.”

“너 사람 놀려? 이게 어떤 시나리오인지 너도 알면서 나한테 이랬어? 너 무슨 생각이었어? 나 8년동안 사람 한 명 못 만나고 살았어. 외로워 죽는 줄 알았어. 너도 내 소식 민재한테 들었다면서. 충무로까지 가고 나니까 아무것도 안 보였지, 너는. 내가 어떻게 사는지, 뭐 어떻게 지내는지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지? 이 영화, 그때 네가 부당한 대우랍시고 주연 빠진 바람에 결국 다 쫑났어. 근데 그걸 알면서도 너는…….”

“…….”

“너 진짜 못돼 처먹었다…….”

 

 

 

무슨 마음으로 말을 꺼냈는지도 모르겠다. 숨도 쉬지 않고 연달아 말을 이어간 탓에 숨이 찼다. 끝도 없이 새어 나오는 눈물 때문에 헐떡이는 와중에도, 녀석이 뻗은 손을 쳐낼 정신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한껏 울상인 채로 날 바라보는 녀석과 눈을 마주했다. 다 끝났다. 사실 만나면 해 줄 말이 정말 많았다. 잘 지냈냐는 말, 어떻게, 배우로는 잘 컸냐는 말, 같잖은 인사치레 속에서 넌지시 던지고 싶었던 말, 어떤 형태로든 재회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말, 말로밖에 전할 수가 없어서 답답한 말, 말, 말.

 

 

 

“나 캐스팅 참여 안 해.”

“내가 정말 미안해. 네가 참여하지 말라고 하면 손도 안 댈게. 정말 그냥 가만히 있을게. 네 마음대로 다 해도 돼. 그러니까…….”

“안 해. 난 여기서 끝이야. 어떤 장면 나오는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짜 놓은 것만 그대로 하면 되잖아. 나중에 크레딧에 이름이나 올려. 니가 다 해. 니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그대로 다 해.”

“내 말 한 번만 들어.”

“그러니까 어디서도 보지 말자. 넌 항상 너 혼자 잘했으니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녀석은 몇 번 더 나를 붙잡으려 용을 썼지만, 애석하게도 거기까지였다. 나는 어느 순간 뚝 멈춘 발소리를 되뇌이며 걸음을 더욱 급히 옮겼다. 김신은 계단 한 층을 남겨 두고 결국 발을 멈췄다.

 

결국 우린 이 정도였던 거다. 계단 한 층 정도의 거리 때문에. 한 층 정도의 자존심과, 한 층 정도의 이기심과, 한 층 정도의 부족함이 다 망쳤다. 나는 건물을 나오는 내내 속절없이 터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거리를 걸었고, 도중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휘휘 저어대며 대답했다. 안 괜찮아요. 그러니까 좀 내버려 두세요……. 우는 탓에 발음조차 불분명한 내 말에 몇몇은 혀를 찼고, 몇몇은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렸다.

 

 

 

나는 이제 내가 정말로 미친 사람인지 아닌지도 고민해야 했다.

 

 

 

 

 

Lapis Lazuli

 

 

 

촬영은 순조롭다고, 종종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김신의 번호가 아닌 것으로 보아 다른 촬영 스태프의 문자인 듯 했다. 물론 그마저도 죄다 무시하고, 끝끝내 전체 스팸을 넣어 버렸다. 결국 영화 개봉 두 달을 앞둔 시점에서부턴 근근히 오던 연락마저 끊겼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당장은 재기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김신을 만난 뒤로 며칠을 숨 붙은 시체처럼 흘려보냈고, 그 이후에 일어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김신의 흔적을 되밟는 일이었다. 녀석은 이미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사랑의 척도를 잰다면 나보다 더할 이들도 수두룩해 보였다. 다들, 연애할 적의 나보다도 열렬했고, 연애할 적의 나보다도 스스럼없었다.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화면을 끄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나는 분명 김신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김신에게 그 열렬함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별로. 생각만큼 연애가 재밌지 않다. 그렇지 않냐, 여야.

그러네.

 

 

 

회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 당시의 난 사랑받는 것에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했다. 사랑은 굉장히 독한 외지의 감정이었다. 좋아할 때 좋아한다 말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녀석이 좋아하는 좋아해에 나도, 라고 대답하는 것이 최선이었고, 녀석이 하자고 하는 것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녀석에게 맞춰 주고, 그러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거리는 나의 상한선이었다. 그 지점을 넘어가면 나 스스로 제어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참은 건데.

 

김신에게 직접 표현하지 못해 멍울 진 감정들은 내 각본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김신은 내 각본을 정말 좋아했다. 동시에 항상 그랬었다. 각본은 정말, 네가 쓴 게 아닌 것 같다고.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고 했다. 경황이 없던 아마추어 시절인지라 아, 그래. 하는 단순한 몇 마디로 흘려보냈던 말들이,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각본은 김신 최후의 보루였다. 제발 한 번만 말해. 좋아한다고. 각본 속의 너처럼 좋아한다 말해. 한 번만 말해 줘. 한 번만 확신 좀 줘. 나는 언어가 필요해. 나는 말이…….

 

 

 

“미안.”

 

 

 

나는 허공에 부질없는 사과를 남기며, 참고 또 참던 울음을 다시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그렇게 속절없이 또 몇 달이 지났고, 우편함으로 시사회 초대권이 날아왔다.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 한 말을 들어 준 것인지, 초대권은 일반석이었다. 망설임 없이 티켓을 반으로 찢고 나서야 속이 탁 트였다.

 

 

 

[미련은 독이야. 미련 갖지 말고 충실해. 너는 나한테, 나는 너한테.]

 

 

 

가장 기억에 남았던 라피스 블루의 구절을 읊으며, 나는 다시 낡은 비디오 가게로 향했다. 오늘은 무간도 2를 봐야겠다.

 

내키지 않으면, 마빈 클래식이라도.

 

 

 

 

 

***

 

 

 

 

 

“김신 씨, 영화 개봉까지 8년이 걸렸다고 들었어요. 이 영화를 끝까지 놓지 않으신 이유가 있나요?”

“두 번은 찾아오지 않을 연애라는 게 일생에 한 번 씩은 있다잖아요. 이 시나리오가 실은 제 얘기거든요. 제목도 제가 지어 준 거예요. 이 시나리오를 작업했던 친구 탄생석이에요.”

“정통 멜로로 기대치가 높은데, 김신 씨 연기가 굉장히 절절하다고 호평이 많았습니다. 혹시 생각하고 연기하신 분은 계셨나요?”

“네, 있죠. 연기하는 내내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연기했어요.”

“그럼, 그 친구분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도 있으신가요?”

“없어요. 아마 말 안 해도 다 알 거예요.”

 

 

여전히 좋아해서, 평생 너 같은 사람은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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