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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미.
내 세상은 흰색이었다. 사실 뭐, 내 세상만 그렇지 않다는 게 조그마한 위로가 되긴 했지만 또 역시 오직 단색의 지루한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나를 언제나 내려앉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언젠가에는 어두웠던 때가 있었을거야, 내 어두운 날들도 금방 끝내겠지. 사람들은 특별한 한 사람을 만난다면 세상을 아름다움을 깨달을 것이라고, 그때쯤이면 모든 것들이 하나 둘 씩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너를 비출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한번도 색을 본 적 없는 사람에겐 그것들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은 그렇지만 때의 나는 정말 몰랐다. 언제쯤 이 하얀 도화지에 검은 연필로 그려넣어진 풍경들이 형형색색으로 칠해질지를.

 

눈을 감았다 뜨면 가끔씩 눈앞에서 스파크가 일 때가 있었다. 습관처럼 눈가에 잔주름이 생길 때 까지 꾹 눌러감다가 번쩍 뜨니, 웅웅대며 순간적으로 돌아가는 세계 가운데로 빛이 새어들어왔다.

 

"저기요?"
"아- 네, 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손님이 없다고 정신줄 놓고 앉아있으면 안되는거였는데. 멍해져 있던 머리가 순식간에 제 정신을 찾는다. 앞에 선 사람은 이십대 초반 쯤 되어보이는 남자. 모자를 쓰고 있어서인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란데 사이즈 프라푸치노 하나 주세요."

 

어리버리하게 자리를 잡는 내 모습이 웃겨보였던 것인지 검은색 모자 밑으로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따분한 시간에, 하나 뿐인 손님. 어서 해치우고 다시 머리를 비워버리자며 몸을 바삐 움직인다. 익숙하게 기계를 몇번 내리곤 성의없진 않게, 그렇다고 정성들인 손길은 절대 아닌 듯하게 음료가 담긴 컵을 밀어낸다. 컵을 집어가는 가는 손을 몰래 흘깃 보다 눈을 돌린 그를 보며 다시 말을 거는 남자.

 

"바리스타 옷이 되게 잘어울리세요. 여기 사장님이라고 해도 믿겠다."
"예..? 여긴 체인점인데,"
"알어요. 그냥 그렇다고."

 

널널한 사이즈로 입은 얇은 칠부 티와 딱 달라붙는 스키니 진에 안어울리게 꽤나 중저음인 목소리로 농담을 던진다. 알바를 하면서 저에게 누가 말을 거는 적은 별로 없는지라 뭐라 반응해야할 것인지 몰라 얼버무리자 남자는 아까보다 더 크게 미소를 그리며 웃는다. 이유없는 패배감에 눈썹을 살짝 구기며 이 살가워 보이는 사람을 왜 하필 알바 중에 만났을까 생각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남자는 소리없이 나가고 없었다. 조금.. 더 앉아있다 가지. 살짝의 왠지모를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 알수없는 남자와 꽤 느긋한 시간을 즐겼었는지 벌써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 감정은 쉽게 없어졌다. 바쁜 하루. 사람은 많고, 기억은 짧다.

 

 

 

 

° ° °

 

 

 

 

"요즘 뭐 일은 하냐? 아니면 또 놀아? 돈 많아서 좋~겠다 김신 이 백수 자식."
"어, 그래 그래."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는 것엔 살짝의 짜증과 귀찮음이 섞여있었다. 지금은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전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듯 하다, 어차피 대화의 요점이 그것도 아니었으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 오랜만에 불린 자신의 이름은 매번 같았던 둘의 대화 주제보다 더 낯설었다. 본인 일은 잘 풀리지 않는지 거하게 취해버려 술주정을 하는 친구에 지난번처럼 토사물 범벅이 되고 싶지는 않은지 조심조심 부축해가며, 밤길을 걸어가는 신이다. 늘 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온통 여전힌 흰색이, 검은 선들 뿐인 세상이 무엇이 영롱하다는 것이고 아름답다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여전히, 밤하늘은 하얗다. 하얀 게 예쁜 것이라면, 오늘 만난 남자도 만만치 않게 하얬는데. 반쯤 잠에 취한듯한 친구의 어깨를 겨우 잡아 한적한 길가를 걸어가며 괜한 생각을 해 본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참 그만하게 하얀 사람을 번 적 없었다. 내 세상은 다 흰색인데, 흰색보다 더 하얗게 빛났다. 특이한 남자였지. 입을 비쭉거리며 걷다보니 큰 길이다. 서 있는 아무 택시나 잡아 친구놈을 밀어넣어 보내고, 집은 근처라 신은 다시 걸음을 바삐한다.

 

밝게 비추는 상점가를 걷다보니, 새삼 재미없는 내 세상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흰색 아니면 검은색. 단순하기도 하지만 포현의 아름다움 따위는 싹 다 무시한 재미없는 평면같았다. 쓸쓸함에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고, 비니에 머리를 폭 박아넣고, 발끝만 바라보며 걷는데 등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아, 무슨...?"
"그쪽 모자가 너무 까매서요!"

 

침착하게 뒤를 돌아본 신의 머리에 순식간에 정전기가 일었다.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자 돌아오는 터무니 없는 대답. 신종 도둑질인가 머리를 손으로 대충 다시 눌러내고 제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살펴보는 신이다. 제 머리에서 벗겨진 비니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보다 조금 더 작은 키에, 여리여리해 보이는 몸매가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제 비니를 계속 돌려 돌려 보며 의문을 진뜩 표하다 저를 드디어 올려다 본 남자에 신은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 구면아닌가요?"
"네에, 그런 면이 좀 있었죠.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울상을 짓는 남자에 말리며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것이냐 묻자 당신 비니가 너무 까맣다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 돌아온다. 제 눈에 보이는 게 정말로 맞다면 이 남자는 오늘 아침에 카페에서 본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때보다 피부가 더 하얘보였다. 의문점이라면 저도 한두가지가 아닌데, 남자는 정말 대답이 당장 필요 해 보였다.

 

"제..모자가 까만게 왜요?"
"너무 까맣잖아요, 원래 이러지 않는데 왜 그러지?"

 

입술을 꼭 깨물고 미간을 좁히는 얼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아침에는 여유있는 모습만 보다가 이리 되니 내가 이기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계속 비니를 돌리고 늘어당겼다 구겼다 해 보며 호들갑을 떠는 남자의 손목을 살며시 잡아 눈높이로 올렸다. 갑자기 잡힌 제 팔에 놀랐지만 저도 그만큼 뜬근없는 행동을 했던 지라, 남자는 가만 보고 있는다.

 

"그쪽은 그럼, 왜 이렇게 하얗죠?"
"어어, 하얗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새하얀 눈동자를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렸다. 놀리는 것이 더 큰 목적이긴 했지만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하얗게 빛나는지. 그것 때문에 자꾸 눈을 감아도 형상이 아른거리는 것인지. 차갑다고 생각했던 내 세상이 오늘같이 추운 날 더 따듯해 보이는지.

 

"이렇게 해요!"
"예?"
"이름이랑 연락처 알려주세요. 서로의 질문에 답을 알게되면 연락하는 거에요. 어때요?"

 

뭐, 나쁠 건 없겠죠. 개인정보가 나가는 것이 싫어, 친구도 몇 사귀지 않는 신으로써는 꽤나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자 활짝 웃으며 제 주머니 어딘가에 들어있는 펜을 찾겠다며 온몸을 다듬는 모습에 숨죽여 웃다, 그새 다 찾았는지 대고 쓰게 등을 좀 빌려달라며 저를 빙그르르 돌리는 남자에 순순히 따른다.

 

"여기 있어요, 그리고 제 이름은 왕여 입니다."
"김신 이에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짧게 악수를 나눈다. 고개를 다시 드는데, 신의 눈 앞에 아지랑이 같은 흰색 연기들이 피어오르며 눈을 어지럽혔다. 눈을 한두번 꾹 감았다 뜨니, 스파크가 일었다. 자신의 이름을 여 라고 칭한 남자의 입술로부터, 세상이 조금씩 제 색을 찾기 시작했다. 흰색 도화지 위로 번지는 물감처럼, 예쁘게 뭉개지는 그림에 감탄으로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김신 씨, 그 답 말이에요. 이미 알아버린 것 같은데."

 

꼭 저만큼 경이로움에 가득찬 눈으로 여가 저에게 들릴 듯 밀들 중얼거렸다. 마찬가지 입니다. 저 역시 중얼거리지만 입 밖으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흰색 세상이 제 눈 앞에서 거의 다 사라져갈 때 쯤. 밤하늘이 상상해본 적 없는 짙은 남색으로 물들고, 상점 감판들이 눈 아픈 색으로 빛을 쏘아댈 때 쯤. 신은 겨우 정신을 차려 다시 여를 바라보았다. 새로이 제 색을 찾은 세상 가운데서 그 하나만 여전히 하얗게 빛났다. 제가 기억하는 흰색보다 더 하얗게. 정말이었다, 순백의 내 세계는 아름다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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