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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었는데? 네 주군은."

 

 

 

 

덮어두고 있던 낡아빠진 기억의 책장을 들춘 건, 다름이 아닌 무례한 동거인의 질문 하나였다.

 

 

답지 않게 취기로 흐트러진 목소리가 역린을 조심스럽게 건드려왔다. 주군. 그 단어 하나에 나릿하게 감기던 신의 눈꺼풀이 흠칫 떨렸다. 어쩌다 대화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기억을 되짚으려는 시도도 알코올로 눅진하게 젖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제가 할지도 모를 이야기가, 대뜸 열린 술자리에서 할 푸념이라기엔 지나치다는 건 알았다. 평소의 신이었다면 함묵했을 것이다. 구백 년 넘게 살아온 관록은 이럴 때 퍽이나 유용하게 쓰이곤 했다. 은근슬쩍 에둘러 넘어가면 더 물어오지는 않을 테지.

 

 

그런 신이 맥주를 한 모금 더 삼키고, 나직한 목소리로 서두를 끌어온 이유는 별것이 아니었다. 퍽이나 술이 잘 들어가는 날이었다. 술기운 때문에. 혹은 그날따라 기분이 좋아서. 그러니까, 절대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물어봐서는 아니라고. 어느 새벽녘의 일.

 

 

 

 

 

[애사]

 

 

 

 

 

의 가장 첫 페이지에 적힌 이름. 왕 여. 혀끝에서 둥글게 굴러가는 그것을 신은 발음했다. 그리고 혀앓이라도 하듯이 그 음절이 남긴 흔적을 깨물었다. 첨예한 통증은 어린 왕의 이름과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여린 부분에 자리 잡아 잘 아물지도 않는 상처. 신에게 있어 여는, 그가 섬기던 주군은 그런 존재였다.

 

 

 

 

"유독 아픈 손가락."

 

 

 

 

고작 아픈 손가락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지. 상념을 토해내는 대신 텅 빈 속에 술을 부으려 했다. 빈 캔을 옆으로 밀어내고 옆자리로 손을 뻗었으나 돌아오는 게 없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쳐다보자 원인인 저승사자는, 안 돼. 하며, 고개를 젓는다. 술도 못 마시는 게.

 

 

 

시비인지 걱정인지 모를 소리에 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웬일로 쉽게 포기하더니 이내 쓰게 웃는다. 하긴, 술에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되짚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금세 텁텁해졌다.

 

 

 

 

"내 세계."

 

 

 

 

이어지는 말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침음이 울렸다.

 

 

 

 

내 운명이었어.

 

 

 

 

 

ㅡ 선천적으로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시계에는 단 한 줌의 색도 허용되지 않는다. 첫 숨을 삼키고,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까지 벌이라도 받듯. 단풍의 색, 비단잉어의 붉게 일렁이는 꼬리, 하늘을 품은 바다 따위는 그들에게는 먼 일인 것이다.

 

 

 

대부분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곤 하지만 아주 극소수는 색채를 되찾기도 하는데, 그러기 위한 방법은 단 한 가지다. 사람들이 흔히들 운명이라고 말하는 그것. 속수무책으로 사랑하게 되는 상대를 찾아내는 것.

 

 

 

그게 제 주군이라니. 우습지도 않은 소리였다.

 

 

 

 

내리깐 속눈썹이 엷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깨비의 몽롱하게 풀어진 표정은 고작 맥주 두 캔으로 나올만한 게 아니었다. 또한 쉬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 달싹거리는 입술을 보며 여는 잠자코 침묵했다. 어느덧 신의 의식은 추억 속을 부유했다. 둘은 그렇게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공기를 눌러댔다. 이유 모를 중압감에 숨이 막히기 시작할 즈음.

 

 

 

한참 후가 되어서야 신은 담담한 목소리로 고했다. 내가 섬겼던, 그러나 나를 배신했던 주군이 운명의 상대였노라. 부정할 여지도 없이. 그를 처음 본 순간 세계가 바뀌었다고.

 

 

 

 

"예쁘더라."

 

 

 

 

기백 년을 살아왔음에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제 어린 왕을 처음으로 본 순간이다. 신의 세계는 지금까지 두 번 뒤집혀왔다. 도깨비로서 처음 눈을 뜬 순간. 또 하나는 인간으로서 처음으로 색을 본 순간.

 

 

 

어린아이 특유의 맑은 눈동자에서부터 빛이 튀어 올랐다. 알이 깨지듯. 멸망을 맞은 하늘에서 처음으로 해가 떠오르듯. 생전 본 적 없는 광경이 물에 탄 잉크처럼 번져나갔다. 그것은 기적이자 감동이었다. 제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주군의 눈동자에서 시작한 균열은, 그의 콧대를 밝히고, 입술에 색을 들이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별의 꼬리를 따라 순식간에 먹빛 시야가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강렬한 통증이 망막을 두드렸지만,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가장 환한 빛 무리들 사이에서 제 운명이 웃었다. 신은 먹먹한 현기증을 느꼈다. 지지대 하나 없이 그 경이에 휩쓸려갔다. 어린 왕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허무하게도 간단했다. 어디 충성 만이랴. 그 이상도 신은 해냈다. 이루어지지 않을 감정이라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매일 전쟁터에서 살았지. 볼 수 있는 건 피의 색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좋았어. 속도 없이."

 

 

 

 

전보다 탁해진 눈동자가 제게 박혀오고, 다시 전쟁터로 내몰려 붉음을 뒤집어쓴 날에는 차라리 전이 더 좋았다는 생각도 해 봤다. 그러나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지키기 위해 휘둘렀던 검이 제 가슴에 꽃이기 전까지.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정적에 괜히 빈 캔을 툭 쳐보자 이번에는 제 옆에 턱, 소리를 내며 시원한 맥주가 얹혀졌다. 아까는 달라고 해도 안 준다더니. 그 사이에 생각이 바뀌었는지 뭔지. 숙였던 고개를 들면, 꼭 뭐 마려운 개새끼마냥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있다. 안절부절 한 눈빛. 그래도 미안하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한다. 저승사자들은 원래 다 저런가?

 

 

 

 

"궁금한 거 있으면 그냥 물어봐. 지금 눈치 보기에는 좀 늦지 않았어?"

 

 

 

"아직도... 색이 보여?"

 

 

 

 

 

신에게 세계를 선물해준 상대는 사라진지 오래다.

 

 

 

 

 

"응. 보여. 이유는 말 안 해줄 거야."

 

 

 

 

 

그러나, 신의 세계는 아직까지도 온전하다.

 

 

 

 

 

남들보다 시붉은 입술이 불퉁하게 내밀어졌다. 불만은 있지만 더는 언급하지 않는 게, 내심 지나쳤다고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시답잖은 장난기가 솟아올랐다. 혹시 의심이라도 할까 친히 주변 사물을 하나씩 짚어 보이며,

 

 

 

 

"이 원목 탁자는 짙은 다갈색. 내가 지금 신은 양말은 파스텔 톤의 하늘색. 더 필요해?"

 

 

 

"아니."

 

 

 

"그리고 내일 네 머리를 장식할 건 분홍색 땡땡이로 할까? 콜? ... 그 탁자 비싼 거야."

 

 

 

 

옆얼굴에 꽃이는 서느렇게 노려보는 시선. 돌아보지 않아도 불만 서린 표정이 선연했다. 그게 유독 익숙하다. 향수, 라기에는 설한처럼 차가운 감정이 가슴을 식힌다. 묘하게 닮은 구석이 속속히 눈에 들어올 건 뭔가. 신은 시야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니건만, 예나 지금이나 참 감정을 숨기는 일에는 서투르다 싶었다. 망령의 환상이 저 너머에서 손을 흔든다. 흐릿하게 겹쳐지는 이목구비에 고개를 저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비식거리는 웃음이 새었다. 미친 거다. 지친 걸지도 모르지. 구백 년이라는 세월은 그랬다. 

 

 

 

 

 

"계속 안 보이다가 요즘 다시 보이기 시작했어."

 

 

 

"도깨비 신부가 그런 것도 해줘?"

 

 

 

 

 

침잠하는 의식을 일깨운다. 정도를 넘긴 음주가 무색하게도 정신 자체는 멀쩡했다. 신은 남은 맥주를 단번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기 시작하고 시간이 꽤 흘러 걸음조차 비틀거리지 않았다. 이래서야 술기운 때문이었다는 변명은 글러먹었다. 말꼬리를 능숙하게 흐리며, 그는 여전히 물어볼 게 많아보이는 저승사자를 외면했다.

 

 

 

 

"글쎄. 참 신기하지. 운명이라는 게."

 

 

 

 

마지막 말은 연기처럼 이지러져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말간 얼굴에 떠오르는 의문을 바라보며 신은 그보다도 더 작게 제 역린을 입에 담았다. 이름 없는 저승사자를.

 

 

 

 

왕 여. 여야.

 

 

 

 

서릿발 같은 시선이 망각으로부터 비롯된 무지를 핥아 내렸다. 모순적이게도, 신은 그의 공백에서 가장 많은 것들을 찾아냈다. 일그러진 공간 너머로 눈 맞춤을 한 순간, 다시금 범람하던 색은 분하게도 어여쁘더라.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를 노도처럼 흠뻑 적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 네가 너였구나.

 

 

 

그만이 일방적으로 가진 비밀이었다. 너조차도 모르는 네 과거를 알고 있다는 것. 그러나, 어지러운 상념이 저승사자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었다. 어느 새벽녘. 도깨비의 작은 심술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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