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은 검은 무명의 옷을 입고,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내게 칼을 내밀었다오.’
<주제 - 黑 赤>
TITLE: 神
무無의 공간이었다. 중천中天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끝없는 눈길이 이어졌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았다. 해도 달도 구름도 없는 공간에서 바람을 대신 해 시간이 흘렀다. 낮도, 밤도 없는 곳에서 여는 죽은 듯 바닥에 뉘인 몸을 내버려 두었다.
“죽었느냐?”
한껏 몸을 웅크려 옹송그린 여의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직 어린 사내아이의 것이었다. 꼭 공기 속을 울리는 목소리에도 여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거, 신기한 일이구나. 이미 죽은 놈이 또 죽으려 발광하는 꼴이라니.”
여를 들여다보던 아이의 목소리가 웅웅, 다시 한 번 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꾸가 없는 여에 심통이 난 듯, 이내 제 조그마한 입술을 비틀었다.
“감히 이 염라閻羅 앞에서 그리 팔자 좋게 누워 뒹굴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이야?”
“...어찌 예까지 오셨습니까.”
“어떠하였느냐. 너의 길고 긴 형벌은.”
어쩐 일로 중천까지 왔느냐 묻는 말에 염라는 대꾸 대신 또 다른 질문을 꺼내놓았다. 신이라는 존재들은 늘 대답을 구하는 이에게 새로운 질문을 쥐어주고는 했다. 여는 다시 재차 묻는 대신 그의 질문에 답을 놓았다.
“지옥의 형벌보다 고통스럽고, 무거웠습니다.”
여의 대답에 염라의 입술 위로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의 죄가 그리 무거운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했을 순간을 너는 그리도 쉽게 버리지 않았더냐. 나는 너에게 그리 짧은 생을 허락한 적이 없다. 너는 네 손으로 너를 버렸다. 그것만큼 용서받기 힘든 죄가 없음을 너는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염라의 목소리에 괜스레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 든 여는 웅크린 몸을 한껏 더 말아 당겼다. 무릎에 이마가 닿을 듯 웅크린 그 모양새에 혀를 두어번 차 내리는 염라의 얼굴이 어린아이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겨내었다. 염라는 잠시 여의 웅크린 등을 바라보다 그 곁에 몸을 낮추어 앉았다.
“신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니야. 특히 그 세월이 오래된 자들 일수록, 손에 쥔 힘이 큰 자들 일수록 성미가 고약하지.”
말을 이어가며 염라는 제 품에서 작은 술병 하나와 겨우 한 모금을 넘길 양이 담길 잔을 꺼내 들었다. 그는 감히 명계의 왕을 앞에 두고도 꿈쩍도 없이 바닥에 웅크린 여를 꾸짖지도, 괘씸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에게 여는 가여운 존재일 뿐이었다. 신에게 사랑 받음으로써.
“너의 바람이 중천을 넘어 칠성 어르신이 계신 곳까지 닿았다더구나.”
“.....”
“몰라도 좋으니. 잠시라도, 찰나라 하여도. 꼭 한 번이라도.”
“......”
“너의 바람이 너를 또 살렸다.”
그 말에 꾹 감기었던 여의 눈꺼풀이 들렸다. 하이얀 눈송이를 걷어내며 들리는 새까만 속눈썹 사이로 흠뻑 젖은 아니,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던 눈동자가 출렁이며 드러났다.
“너의 네 번의 생은 이미 진즉에 끝이 났다. 길고 길었던 차사로써의 벌도 끝이 났다. 허나, 그렇다하여 너의 모든 시간이 끝났다고는 한 적은 없다.”
여는 말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새로 스며난 뜨거운 열은 이내 눈밭을 녹이며 땅 속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어찌 또 나를 흔듭니까.”
한탄과 같은 여의 목소리가 눈바람에 밀려 흐트러졌다. 옷깃에 덮인 손이 곱아들고, 그 허연 손등 위로 푸른 핏줄기가 도드라졌다. 그런 여의 손을 흘낏 눈에 담은 염라가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여의 등 위로 올렸다.
불어온 바람이 얼어붙은 여의 뺨을 쓸어내고, 붉던 입술을 할퀴었다.
“특별히 사랑하여.”
여의 얼굴이 바스락, 일그러졌다.
*
이만하면 되었습니까? - 차양을 걷으며 들어서는 염라의 모습에 찻잔을 기울이던 칠성이 반가운 기색의 띄었다.
“아이는 잘 내려 보냈는가?”
“예. 말씀하신대로 했습니다만, 이거 월권 아닙니까?”
칠성의 물음에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맞은편에 앉는 염라의 모습은 조금 전 여를 만날 때와는 다른 형상이었다. 예닐곱살 난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장년의 모습으로 변한 염라가 금실 수가 놓인 붉은 옷의 소매 자락을 걷으며 칠성이 내미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네 번의 생이 끝난 아입니다. 벌도 받을 만큼, 아니. 차고 넘치게 받았습니다. 이제는 놓아줘도 되는 것 아닙니까. 저 아이도 쉬어야지요.”
부루퉁한 염라의 말에 낮게 목울대를 울리며 웃어낸 칠성이 답했다.
“스스로가 바라지 않았던가. 나는 가여운 이들을 외면하는 법을 몰라서 말이야.”
“칠성군께서 더욱 불행으로 밀어 넣으시는 건 아니시고요?”
“거, 자네 참..말이 지나치구만.”
내내 웃음을 머금었던 칠성의 탐탁찮은 목소리에 염라는 대꺼리를 하는 대신 괜스레 손에 든 찻잔을 입으로 옮겨 갔다. 지나치긴, 뭐가 지나 쳐. 못 되 쳐 먹은 영감탱이. 멀쩡한 애들을 왜 자꾸 괴롭히고, 나는 왜 또 귀찮게...
“다 들리네만, 염라.”
“...흠흠.”
무표정한 칠성의 얼굴에 헛기침을 고르던 염라가 새삼 궁금증이 인 듯 그에게 물었다.
“헌데 어찌 저 들에게 이리 '배려‘를 베푸십니까?”
“그대가 말 했지 않은가. 특별히 사랑하여, 라고.”
“그러니까, 어찌 그 들을..”
염라의 말에 칠성이 빙긋, 웃으며 탁자 위에 놓인 도자기 병을 향해 손짓하자 따뜻한 차가 담겼던 병은 이내 달큰한 술 향이 나는 호리병으로 변하였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의 시작이 말이네..”
오랜 시간을 관망하던 방관자의 이야기가 시작 되었다.
*
여가 갓 태자의 신분을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어린 태자를 앞에 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첨을 떨며 고운 말들만 내밀었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사탕 하나 쥐어 주 듯.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입을 통해 전해지는 소문은 천정 모서리에 피어나는 곰팡이마냥 음험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린 태자의 주변에는 짙은 피 냄새가 풍겨난다고.
바람을 타고 처마 밑으로 숨어드는 소문에 여는 밤이면 차렵 속에 숨에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몇 해 간 병증으로 서거한 친척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저 황실의 어린 막내 왕자에 불과 했던 자신은 어느 새 태자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것도 나날이 병들어가는 황제의 뒤를 이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모든 것이 두려운 나날이었다. 이어진 친척들의 죽음 뒤에 독을 내뿜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눈치챈지 오래였다. 자신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헝겊 인형을 다루듯 제 입맛대로 움직이는 걸 알면서도 싫다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 자의 손에서 뿜어져 나올 독이 저를 향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그 첫 째였고, 그가 제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여의 아버지는 여가 걸음을 내 딛기도 전에 명을 달리했고, 그 뒤 옥좌에 올라앉은 나이터울이 많던 형은 정사를 빌미로 여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태자의 자리에 오를 만한 이들은 모두 관짝을 타고 궁을 나갔고, 이미 그를 품에 안은 시중을 두려워한 이들은 여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여에게 손을 내밀던 이는, 여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던 이는 오직 그 시중 하나뿐이었다. 고독의 나날이었다.
어느 새 열 다섯의 탄신일을 맞은 여의 연회가 열리었고, 태자의 축일에 모든 고관대작들이 화려한 선물들을 보내어 왔으나 연회에 참석한 이 들은 그 중 반도 되지 않았다. 황제조차도 겨우 아침 문안 때 축원하노라, 말을 건넨 것이 전부였다.
요란스러운 악곡 소리가 울리고, 고운 비단의 옷을 걸친 무용수들의 몸짓이 이어졌지만 그들 보다 한 단은 높은 곳에 올라앉은 여의 얼굴은 어색한 미소만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시중 어르신.”
문 너머에서부터 잽싸게 달려 온 문지기가 여의 곁에 서 있던 시중을 부르자 즐거움을 두른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던 시중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이내 그가 여를 불렀다.
“전하. 상장군 김 신이 당도했다 하옵니다.”
“상장군께서요?”
“예. 허나 이리 연회 도중에 드나드는 것도 다른 대신들 보기에 좋지 않으니 그냥 물리시는 것이..”
“그래도 이 나라의 상장군 아니십니까. 신하의 체면을 챙기는 것 또한 태자의 덕이라 배웠습니다. 얼른 자리를 준비 하세요.”
시중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섰다, 이내 손짓을 하여 악곡을 멈추고 시종 아이를 불러 상을 차리게 했다. 그의 지침에 따라 다시 문 밖으로 달려 간 문지기가 연회장의 문을 활짝 열었다.
유월의 눈부신 햇살 속으로, 붉은 문을 넘어 들어서는 칠흑의 사내의 모습을 여는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다. 오래토록 전장을 누빈 탓에 문관의 것들만큼 곱지 못한 머리칼은 그가 걸친 옷보다도 더욱 검었고, 사내다운 단정한 얼굴 속 자리한 두 눈은 온통 검은 와중에도 광채를 머금은 듯 빛나고 있었다. 허리춤에 차고 온 칼을 문지기에게 맡기고 여의 앞으로 당당히 걸어오는 그 걸음, 걸음이 여에게는 아주 느리고도 또렷이 각인 되고 있었다.
갑옷의 철컹이는 소음도, 잘 다듬어진 돌바닥을 내딛는 발소리도, 스치는 바람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모습도 그 모든 것이 기억 속에 자리를 틀었다.
“상장군, 김 신. 태자 전하의 탄신일을 경하 드리옵니다.”
어느 새 여가 앉은 단의 앞까지 다가온 신이 두 손을 모아 그에게 절을 올렸다. 그의 인사에 잠시 입을 달싹이던 여는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고맙소. 전장에서 돌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들었거늘 이리 와 주니 기쁩니다, 장군.”
“아닌 말씀이십니다. 되려 늦게 찾아뵈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와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연회장은 낮은 비웃음이 나돌았다. 분명 관직으로는 이미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자들보다 높은 것이 분명했으나, 이곳에 자리한 대신들은 모두 문신이었다. 그것도 모두 힘없는 현 황제의 충신들을 업신여기며 권세를 떨치는 시중의 사람들. 그런 그 들이 현 황제의 충신이자 무관인 신의 방문을 달가워 할 리가 없었다.
“늦게라도 와 주어 더욱 감사하오. 자리를 마련했으니 함께 연회를 즐기시지요.”
“송구하오나, 오늘은 황제 폐하께서 관군들의 정비를 명하셨기에 이만 물러가야 할 듯 하옵니다.”
그런 신의 말에 여기저기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왔다. ‘폐하와 태자마마 두 분 모두의 명을 받잡느라 공사가 다망하십니다, 아주.’어딘가에서 들려 온 말소리는 그 주인을 찾는 여의 시선에 이내 숨어들었다.
“무례한 줄 아오나, 이것을 전해 드리려 찾아뵈었습니다. 전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자 단 아래에 서 있던 궁녀가 얼른 받아 들고 여에게 올렸다. 고운 자주색 보에 쌓인 것은 옥으로 만든 벼루와 붓이었다. 보가 풀리고 그것을 본 여는 한껏 기뻐하였으나, 단 아래 늘어앉은 대신들과 곁에 선 시중은 썩 유쾌한 얼굴이 아니었다.
“화서에 흥미를 두신다 전해 들었습니다. 저 멀리 송에서 건너 온 물건이니 부디 기꺼이 받아주시옵소서.”
“태자전하의 탄신일 진상으로는 퍽이나 단촐 합니다. 이건 필시 태자 전하를 업신여기어....”
신의 말에 시중이 여의 귓가에 언짢은 목소리를 흘렸으나, 여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고맙습니다, 상장군. 내 기꺼이, 기쁘게 받겠습니다.”
그 웃음에 곁에 선 시중의 서늘한 시선이 천천히 신을 향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래도록.
*
김 신이라함은 여와 자주 마주친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 이야기만은 어릴 적부터 종종 들어오던 자었다. 선대의, 선대의, 또 그 선대의 선대 때부터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 했던 집 안의 장군으로 그가 나선 전장에 백기란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온통 검은 옷을 두르고,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시뻘건 피를 뒤집어 쓴 그의 모습은 무신武神의 모습 그 자체라고 했다. 나가는 싸움마다 백전백승으로 유명세를 떨친 그의 위세에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도 했다. 그리고 후일에는 저를 위해, 저의 나라를 지켜 줄 이였다.
궁내에서 활을 쏘거나, 연무장에서 선생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이 아는 무예의 전부였던 여에게 그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가 믿고 따라야 할 또 하나의 스승이라 생각했다. 연회 이후 그가 다시 전장에 나가기 전까지 여의 청에 그는 가끔 태자전에 들러 그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기도 했고, 차를 나누기도 했다. 항간에서는 그가 곧 죽을 날을 기다리는 황제에 이어 새로 옥좌에 오를 태자에게 줄을 대는 것이라 떠들어 댔으나 여도 신도 아무런 내색 없이 만남을 이어갔다.
“장군은 좋겠습니다.”
“무엇이..말입니까?”
신중히 활 시위를 당기던 여의 목소리에 곁에 다가 서 그를 지켜보던 신이 반문 했다.
“말도 잘 타고, 검술도 잘 하고, 활도 잘 쏘고. 밖에 나가 너른 평원을 달리기도 할테고, 꽃이 흐드러진 산도 볼 수 있고..여러모로 말입니다.”
“3점이옵니다!”
이번에도 여의 활을 벗어난 화살은 그리 좋은 점수를 내지 못했다. 그에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여가 입술을 불퉁히 내밀고 활을 내렸다.
“말을 타지 못하면 나아감이 더디기 때문입니다. 활을 잘 쏘고, 검술을 잘 하게 된 것은 그 화살에, 칼에 찢겨 죽은 이가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너른 평원 대신 바닥에 즐비한 시신을 밟고 달리고, 꽃 대신 피가 흠뻑 젖은 산을 봅니다.”
신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울분이나 비탄에 찬 목소리도 아니었고, 그저 내일은 날이 맑다고 합니다. 따위를 말하는 것처럼 조곤히 대답을 건네며 새 화살을 받아든 여의 등 뒤로 다가 서 그의 두 팔을 쥐고 손수 자세를 잡아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 뿐만이 아닙니다. 전장에 나가는 모든 병사가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두려움에 물러서지 않는 것은 이 나라를 지켜 내기 위해서입니다. 폐하의 나라를, 그리고 장차 전하의 나라를.”
“10점이옵니다!”
신의 손에 감싸진 여의 손길에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의 정 중앙을 꿰뚫었다. 여는 제 손가락의 얼얼함보다 귓가에 닿아 온 신의 목소리에 더욱 어깨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태자전하께서는 병사들만큼 절박한 마음으로 이 나라를 지켜 내셔야 합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앞으로 태자전하께서 지켜 주셔야 합니다.”
신의 말에 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고독에 짓눌려, 살고자 하는 마음에 짓눌려 시종의 꼭두각시인 어린 저가 이 나라를, 제 백성을 어찌 지킨다는 말인가.
“그리고 전하께서 백성을 지키는 일에 마음을 다하실 수 있도록, 전하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어느 새 곁으로 물러선 신의 곧은 시선이 여에게 닿았다. 다짐과도 같은, 약조와도 같은 굳은 목소리에 여의 입술이 꾸욱 다물렸다. 그는 달랐다. 제게 아첨하던 대신들과도, 저의 눈을 보지 않으려 하던 황제와도, 저를 가지고 노는 시중과도.
“저는 전하를 지켜 낼 것입니다.”
처음으로 저를 지켜주겠다 약속한 그의 말에 여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
그리고 시간이 흐른 날이었다. 병증에 시달리던 황제는 결국 눈을 감았고, 그의 뒤를 이어 여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그 때. 촛불이 유난스레 흔들리던 그 날 밤, 서책을 읽어 내려가던 여의 침소로 시중이 든 것이.
“상장군을 주축으로 역모의 기운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폐하.”
처음이었는데.
“폐하 대신 스스로 왕좌에 오를 것이라 소리치고 다닌다고들 합니다.”
입 밖으로 꺼내 보지도 못 한, 혼자 마음속으로만 그리던 첫 정이었는데.
“그를..멀리하셔야겠습니다, 폐하.”
하필이면 그대는 이 뱀 같은 사내의 눈에 들어.
열이 오르는 눈을 질끈 감아내는 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
신이라고 몰랐을까. 이미 시종이 여의 뒤에서 그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여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궁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기에 더욱 신은 나약한 여를 멸시하는 대신 그에게 이 나라를 온전히 갖게 하리라, 저 간신을 물려내고 그가 나라를 위해 바른 왕이 되도록 만들리라, 여에게 충언을 올리었다.
허나, 이미 궁은 모두 시중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와 함께 여에게 충언을 올리던 대신들은 하나, 둘 간신의 손에 죽어 나갔고, 신과 같은 무관들은 끊임없이 전장을 나돌아 다녔다. 한 해에 도성에 머무는 기간이 채 한 달도 되지 못했다. 그것은 시종의 뜻이었고, 또 한 여의 뜻이었다.
여는 신을 도성 안에 두지 않았다. 변방으로, 오랑캐들이 득실거리는 전장으로. 그 어디여도 시종의 손길이 닿는 도성보다는 낫다 생각하였다. 시종의 손에 피를 토하며 처참히 죽는 것보다는 전장 쪽이 더 살아 돌아 올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그 짧은 유예기간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신의 부재에도 그를 찍어내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시중은 그의 누이를 눈에 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누이이자 여의 반려가 된 선은 여를 지키라, 신이 보낸 것이었다. 현명한 여인이니 여가 길을 잃지 않도록 그를 이끌 수 있을 것이며, 가문의 힘을 빌려 여의 힘이 될 수도 있었고, 또한 올곧은 성정으로 결코 시중에게 물러서지 않을 아이였기에 그를 황후의 자리로 주선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선은 여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고, 정이 필요했던 여에게 누구보다 다정스레 손을 내밀어 주기도 하였다.
그런 선이 시중의 눈에 고울 리가 없었다.
“폐하, 황후마마에 대한 괴이한 소문이 온 궁 내에 파다하다 들었습니다.”
시중의 목소리에 상소문을 읽어가던 여의 움직임이 멈춰 들었다.
“그 분의 처소에 몇 몇 대신들이 드나드는데, 그 대신들이 그 자들이라지요. 김 신 장군과 역모를 꾀한다는 소문에 이름을 올린 자들 말입니다.”
“...증좌도 없는 헛소문을,”
“왕위를 빼앗긴 뒤에도 그리 말씀 하실 겁니까, 폐하.”
여와 마주 앉은 시중은 신하의 예를 갖추어 몸을 낮추기는 했으나 그 태도는 결코 신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의 가장 친밀한 친우이자, 충신이자, 아비가 된 냥 여를 대하고 있었다.
“본디, 누런 싹은 진즉에 뽑아버려야 하는 법입니다.”
“황후의 집안은 선대 때부터 대대로 황실을 지켰던 충신 중 충신의 집안이 아닙니까. 또한, 그의 오라비인 상장군은 내내 전장을 휩쓸며 오랑캐를 막아 내고 있소.”
여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엔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소란보다 못 한 것이 분명했다. 여의 단호한 말에 시중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단 한 번도 제게 반기를 드는 일이 없던 여 였다. 그러나 신과 황후가 곁에 있은 후로 여는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하려는 움직임으로.
“..그렇다면 그 들에게 반하는 언을 바치는 저는, 간신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잔뜩 허리를 굽힌 채 치켜 뜬 눈 속으로 여를 담는 시중의 모습에 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꾸욱 말아 물고 말았다. 냉한 한기를 품은 두려움이 여의 등을 타고 올랐다.
“폐하, 그간 폐하를 키운 저를, 폐하를 옥좌에 앉혀 드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던 저를..이리 간신으로 매도하시니 신, 서운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대를 내 어찌,”
“이번 전쟁에서도 상장군께서 승전보를 올리셨다고 합니다.”
“....”
“그리고 다음 전장은 이 궁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시중.”
“부디 폐하께서 옳은 결정을 내리시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옵니다.”
시중은 문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여에게서 시선을 물릴 줄을 몰랐다. 혀를 날름거리는 뱀의 또아리가 또 한 번 여를 옭아매고 있었다.
*
그리고 그 후 여가 신을 마주한 것은 바짝 날이 선 검을 사이에 둔 밤이었다.
“분노와 염려를 담아, 검을 내린다.”
제 앞에 내밀어진 검을 내려다보던 신의 눈이 여를 향했다. 곧게 뻗어 진 그 시선에 여는 흔들리려는 시선을 잡아 두는 것에만 집중했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가고, 할 수 있는 한 돌아오지 말라.”
“폐하, 그 말씀은...폐하, 어찌 그런..폐하의 고려이옵니다. 변방을 수비하라 명하시어 변방을 지켰고, 적을 멸하라 말하시여 적을 멸하였고,”
당황한 듯 여를 올려다보는 신의 눈길이 여에게는 그 어느 화살의 꿰뚫음보다도 아프게 저미고 지나갔다. 그러나 신의 등 너머로 시중의 안광이 넘어들고 있었다.
“누이가 여기에 있고 백성이 여기에 있는데,”
“황제의 근심을 이젠 그대가 하는구나.”
들켜서는 아니 되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에게 이런 모진 말을 내어 주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머리 위에 울러 쓴 관이 너무도 무거워 여는 자꾸만 옷깃을 말아 쥐었다.
“장렬히 죽었다 기별하라. 애통하다 기별할 것이니.”
“.....”
“어명이다.”
뱀은 죽었고, 신은 나락을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것은 여, 자신이었다. 여의 온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
“그래서 그 도깨비 놈은 전장에서 죽어 도깨비가 된 것 입니까?”
이미 비어버린 염라의 잔으로 술을 채운 칠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여의 손에 죽었다.”
“예?”
“그는 어렸고, 두려움이 큰 자였다. 또한 순진하기 짝이 없었지. 그 간신 놈의 겁박이 직접적인 위협이 되어 돌아오기 직전, 도깨비가 되어버린 자가 또 다시 승기를 들고 돌아왔다. 그대로 도망이라도 갔길 바랐지만 그 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 곳이 제 무덤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그리하였다. 여는 황후를 내어주고라도 그를 살리고 싶었다. 더 많은 피를 내 보이고서라도 그가 멈추길 바랬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 자가 나아가는 법 밖에는 몰랐기에.”
칠성의 이야기에 염라는 혀를 내 둘렀다. 인간이라는 것들은 어찌 그리 나약하여. 도깨비가 된 그 자는 어찌 그리 미련하여. 고개를 내 두르는 염라를 보며 슬쩍 웃음을 보인 칠성이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 도깨비가 된 자를 도깨비로써 살게 한 것은 그의 백성이었다. 그러나 또한, 여의 바람이 컸다.”
“몰라도 좋으니. 잠시라도, 찰나라 하여도. 꼭 한 번이라도 다시 볼 수 있도록.”
“그래. 그 미련한 놈이 죽기 전까지 수 백, 수 천 번을 바라던 일이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여가 죽은 뒤 제 복수를 위해 궁으로 돌아간 그 자가 여의 시신을 앞에 두고 무어라 하였는지 아느냐?”
글쎄, 저라면 어찌 제게 그럴 수 있었느냐 분노라도 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술잔을 채우는 염라의 앞으로 칠성의 웃음기 섞인 말이 던져졌다.
“몰라도 좋으니. 잠시라도, 찰나라 하여도. 꼭 한 번이라도 다시 한 번 그대를 볼 수 있다면.”
“예?”
“그 미련한 놈이 여와 같은 소릴 하더구나. 그래서 그 간절함에 내가 소원을 들어 주었지.”
“아니, 그러니까..거..”
짙은 제 한 쪽 눈썹을 출렁이며 반문하는 염라의 얼굴이 우스워 한 참 웃음을 터트린 칠성이 말을 받았다.
“애초에 도깨비 신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깨비 놈의 가슴에 꽂힌 칼은 그 사명을 다해야만 사라진다.”
“사명이라니요?”
“그 놈이 애초에 약조 하지 않았느냐. 여를 지켜내겠다고. 저 도깨비 놈이 찾고 있는 건 여, 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 아직 도깨비의 가슴에는 칼이 온전했다.
“하지만 여가 그 자의 곁에 머문 것이 벌써 몇 번째입니다. 여야 제가 저와 만난 기억이나 이승의 기억들을 지워 그렇다 하여도 어찌 그 자는 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자 역시 내가 기억을 지우기에.”
“어찌하여.”
“그래야만 그 들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나아갈 수 있기에. 한 때나마 행복이란 것을 손에 쥘 수 있기에.”
신이라는 존재는 선하고 악한 존재였다. 그른 것에 혹독하고, 옳은 것에 관대한 존재들. 그러나 염라는 그러기에도 칠성은 너무도 선하고 악한 존재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좀 배알이 꼴려 그런 면도 있고 말이야.”
“예?”
뜬금없는 칠성의 말에 염라가 다시 물었다.
“여가 처음 죽었을 때, 그 간절함에 내가 목소리를 내렸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뭐라 그랬는가 아느냐?”
“뭐라고 했답니까?”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입을 다물고 술잔을 채우다 피실, 바람같은 웃음을 터트린 칠성이 대답했다.
“그대는 신이 아니오. 나의 신은 검은 무명의 옷을 입고,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내게 칼을 내밀었다오. 나에게 신은 없습니다, -라더군.”
신의 앞에서 신을 부정하고 또 다른 신을 내세웠다. 이 모든 사단의 발단은 아마 여의 그 한 마디에서 시작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신은 그 속이 아주 좁으니 말이다. 잠시 고개를 내젓던 염라가 슬 취기가 돈다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든 궁금증에 다시 한 번 칠성을 불렀다.
“그런데 말입니다.”
“음?”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이거.”
염라의 물음에 잠시 곰곰이 생각을 가늠하던 칠성이 고개를 갸우뚱 젖히며 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마..앞으로 한 번 정도 더? 벌써 그 간신 놈을 둘의 앞에 데려 가기엔 그 분노가 너무도 크다. 그럼 결국 또 둘은 그 자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앞으로 한 번은 더 기억이 지워져, 몇 백년을 차사 일로 부려 먹여 질 여를 떠 올린 염라가 깊은 한 숨을 내 쉬었다.
*
무無의 공간이었다. 중천中天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끝없는 눈길이 이어졌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았다. 해도 달도 구름도 없는 공간에서 바람을 대신 해 시간이 흘렀다. 낮도, 밤도 없는 곳에서 여는 죽은 듯 바닥에 뉘인 몸을 내버려 두었다.
“죽었느냐?”
한껏 몸을 웅크려 옹송그린 여의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직 어린 사내아이의 것이었다. 꼭 공기 속을 울리는 목소리에도 여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거, 신기한 일이구나. 이미 죽은 놈이 또 죽으려 발광하는 꼴이라니.”
여를 들여다보던 아이의 목소리가 웅웅, 다시 한 번 울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꾸가 없는 여에 심통이 난 듯, 이내 제 조그마한 입술을 비틀었다.
“감히 이 염라閻羅 앞에서 그리 팔자 좋게 누워 뒹굴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이야?”
“...어찌 예까지 오셨습니까.”
“어떠하였느냐. 너의 길고 긴 형벌은.”
어쩐 일로 중천까지 왔느냐 묻는 말에 염라는 대꾸 대신 또 다른 질문을 꺼내놓았다. 신이라는 존재들은 늘 대답을 구하는 이에게 새로운 질문을 쥐어주고는 했다. 여는 다시 재차 묻는 대신 그의 질문에 답을 놓았다.
“지옥의 형벌보다 고통스럽고, 무거웠습니다.”
여의 대답에 염라의 입술 위로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의 죄가 그리 무거운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했을 순간을 너는 그리도 쉽게 버리지 않았더냐. 나는 너에게 그리 짧은 생을 허락한 적이 없다. 너는 네 손으로 너를 버렸다. 그것만큼 용서받기 힘든 죄가 없음을 너는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염라의 목소리에 괜스레 꾸지람을 들은 기분이 든 여는 웅크린 몸을 한껏 더 말아 당겼다. 무릎에 이마가 닿을 듯 웅크린 그 모양새에 혀를 두어번 차 내리는 염라의 얼굴이 어린아이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겨내었다. 염라는 잠시 여의 웅크린 등을 바라보다 그 곁에 몸을 낮추어 앉았다.
“신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니야. 특히 그 세월이 오래된 자들 일수록, 손에 쥔 힘이 큰 자들 일수록 성미가 고약하지.”
말을 이어가며 염라는 제 품에서 작은 술병 하나와 겨우 한 모금을 넘길 양이 담길 잔을 꺼내 들었다. 그는 감히 명계의 왕을 앞에 두고도 꿈쩍도 없이 바닥에 웅크린 여를 꾸짖지도, 괘씸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에게 여는 가여운 존재일 뿐이었다. 신에게 사랑 받음으로써.
“너의 바람이 중천을 넘어 칠성 어르신이 계신 곳까지 닿았다더구나.”
“.....”
“몰라도 좋으니. 잠시라도, 찰나라 하여도. 꼭 한 번이라도.”
“......”
“너의 바람이 너를 또 살렸다.”
그 말에 꾹 감기었던 여의 눈꺼풀이 들렸다. 하이얀 눈송이를 걷어내며 들리는 새까만 속눈썹 사이로 흠뻑 젖은 아니,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던 눈동자가 출렁이며 드러났다.
“너의 네 번의 생은 이미 진즉에 끝이 났다. 길고 길었던 차사로써의 벌도 끝이 났다. 허나, 그렇다하여 너의 모든 시간이 끝났다고는 한 적은 없다.”
여는 말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새로 스며난 뜨거운 열은 이내 눈밭을 녹이며 땅 속으로 깊이 숨어들었다.
“어찌 또 나를 흔듭니까.”
한탄과 같은 여의 목소리가 눈바람에 밀려 흐트러졌다. 옷깃에 덮인 손이 곱아들고, 그 허연 손등 위로 푸른 핏줄기가 도드라졌다. 그런 여의 손을 흘낏 눈에 담은 염라가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을 여의 등 위로 올렸다.
불어온 바람이 얼어붙은 여의 뺨을 쓸어내고, 붉던 입술을 할퀴었다.
“특별히 사랑하여.”
여의 얼굴이 바스락, 일그러졌다.
“그리 사랑하시어, 나를, 그를 이리 나락으로 떠미시는 겁니까? 어찌해 그의 가슴에 박힌 칼을 뽑아 줄 도깨비 신부를 제 손으로 거두게 하셨습니까. 하필이면 왜 그 자가 제 마지막 망자였습니까.”
울음에 젖어든 여의 목소리는 잔뜩 일그러져 짓눌린 채 흘러 나왔다. 그 자는 도깨비 신부가 아니다. 도깨비 신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신의 눈속임일 뿐. 신음에 가까운 그 오열에 염라는 대답을 내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그는 이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는 여의 이마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지막이다, 여야. 너에게 내리는 벌은 이걸로 끝을 맺을 것이다. 흔들리지 말아라, 잡아먹히지도 말아라. 이번에는 꼭, 너를 지켜 내거라.”
염라가 입을 다물자 여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방금 전까지 울었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염라는 지난 번 칠성과의 만남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올린 부탁을 떠올렸다.
‘그럼 그 마지막은 그 도깨비의 기억을 지우지 마십시오.’
‘뭐?’
‘어차피 마지막이라셨지 않습니까.’
‘어째서 그래야 하지?’
‘몇 번이고 기억이 지워져, 몇 번이고 제 전생의 기억에 늘 처음처럼 아파한 여를 향한 저의 배려라고 합시다.’
검은 무명의 옷을 입고,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내게 칼을 내밀었던 너의 신의 가슴에 꽂힌 칼을 뽑아 오거라, 사랑하는 여야.
*
유독 날이 궂었다. 히끄무레 물이 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듯 했으나 정작 공기는 습하기만 했다. 여의 부름에 이끌려 ‘공간’에 머물던 망자는 스스로 계단을 올랐다. 텅 비어버린 찻잔을 무명으로 닦아 내는 여의 얼굴에 피곤이 드리웠다.
몇 번을, 몇 년을, 몇 백년을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깨우치게 하고, 도망치려 발버둥 치는 이를 겁박하여, 때로는 힘을 써 이곳에 데려 온다. 그리고 신의 배려라는 망각의 차를 내민다. 그것이 저의 업무였다. 남녀노소, 선과 악을 가리지 않는 손님들의 방문 후에 여는 매 번 이렇게 피곤에 짓눌리고는 했다. 벌이라며 내려진 이 일은 지옥 불에 갇혀 갖은 형벌을 질 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일이 분명 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닦아 낸 찻잔을 제 자리에 올려두고 ‘공간’을 나서려 문자를 울러 썼을 때였다. 창밖의 인영에 모든 순간이 멈춰 선 것이.
“도..깨비?”
[저승사자..?]
멀끔한 코트를 차려 입고, 정갈하게 다듬은 머리를 한 이는 몸 주변에 이는 푸른 불길이 그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한 쪽 눈을 찡그리며 창 너머 여의 모습을 훑어보다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아주 상스러운 모자를 썼군.]
대수롭지 않게 스쳐 지나간 눈길과, 바람결에 실려 들어 온 그 말에 여는 한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스쳐 모퉁이를 돌아 몸을 숨긴 그 사내가 홀로 제 가슴을 쓸며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제야 다시 너를 만나는 구나.”
여가 본 사내는.
온 몸에 푸른 불꽃이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그 사내는.
인간이 아닌 그 사내는.
제 마음 속에 고이 품었던 첫 정을 지키기 위해 피로 물든 길을 나아갔던, 여의 신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