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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상장군 김신을 들라하라. 여는 며칠 내내 피죽도 먹지 못해 바짝 마른 목소리로, 그 한마디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상장군 김신을 들라하라. 내 그에게 친히 전할 말이 있다. 김신을, 들라하라. 서슬 퍼런 눈으로 늘 제 곁을 지키던 박중헌은 사라졌다. 저 좋을 대로 나라를 주무르고 있겠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김신을 들라하라. 한 번 더 힘주어 말해보았다. 평생을 반복해서 지껄일 수도 있을 정도로 입 안에, 혀 위에 이 한마디만 남은 것 같았다. 그 문장의 참혹함을 견디지 못해, 여는 침상위로 힘없이 무너졌다. 시든 꽃잎의 가장자리처럼 힘없이 바스락거리던 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일렁이는 순간이었다. 여의 모든 것이 착실히 흐려지던 과정 속에서 그 아무도 진실을 말해주는 자가 없었다. 김신이 죽었다고. 제 손으로 죽였다고. 그의 시신은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채 들판 한가운데서 썩어가고 있을 거라고.

 

 

 

 

"나를 연모하느냐."

"선왕께서는 제게 폐하를 지켜 달라 명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따를 뿐입니다."

"나를 연모하느냐고 물었다."

"미천한 제게 어찌 그런 것을 물으시는지."

 

천하기를 따지자면 나도 마찬가지인 것을. 여는 체통 없이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우직하게 무릎 꿇고 있던 신이 난처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기를 바라면서. 그의 단단한 균열이 좋았다. 제멋대로인 저를 보면서 어찌해야할 줄 모르겠단 표정을 지어주길 바랬다. 철없는 열병을 앓았다. 시작이 언제인줄도 모르는.

 

"곧 있으면 석강시간입니다. 준비하심에 있어 지체하는 일이 없으셔야 할 줄로 아룁니다."

"너는 줄곧 내게 그런 말들만 늘어놓는 구나. 시선 한번 주지않구선."

"...송구하옵니다."

 

퍽이나 그렇겠군. 물러가라. 언제 그랬냐는 듯 오만한 표정이 되어 저를 무르는 어린왕의 변덕에 신은 속으로만 웃음을 삼켰다. 표정을 감추어내는 일은 검을 드는 일보다 쉬운 것이었음으로.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 전해라.' 신은 어린 왕의 처음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의관을 정제하고서 어설프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걷던 그 모습을. 주군이었다. 제가 일생을 걸고 지켜내야 하는 존재. 검에 온갖 것의 피를 다 묻히면서도 신은 단 한 번도 죄악감에 빠진 적이 없었다.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 작았던 존재가 커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좋았다. 햇살처럼 가볍게 웃고 지는 노을처럼 길게 늘어져가는 뒷모습을 오래 바라볼 때면 억겁처럼 긴 시간도 단숨에 흐르는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더 진해지고 단단해지는 눈빛에는 제 가슴이 더 울렁거렸다. 신은 그렇게 어린 왕을 연모했다. 이 불손했던 마음을 감히 그리 칭할 수 있다면야. '돌보지 않음으로 돌보았다 전해라.' 잊지 말아야 할 명을 머릿속에 수없이 새기면서 신은 때로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나를 연모하느냐. 그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울컥, 답을 쏟아낼 것 같아서. 어차피 제가 가진 戀心은 하잘 것이 없었다. 너절했다.

 

 

 

 

김신을 멀리하셔야 합니다. 박중헌은 끊임없이 속삭였다. 피곤하니 돌아가라는 말로 내치기를 여러 번, 그의 검은 속삭임은 도무지 거역할 수가 없었다. 거역이라니 그 출신이 보잘 것 없기는 하나 왕후장상의 씨가 바로 자신 아닌가. 여는 서책을 읽다가도 문득 신을 떠올렸다. 조가비 마냥 굳게 다물어져 벌어지지 않는 입술, 결코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는 다정한 단호함. 물결치듯 유려한 곡선으로 흐르는 눈꼬리는 유순했으나 짙은 먹색으로 물든 눈동자는 그 누구보다 강건했다. 그 안에 저가 오롯이 담기는 일이 좋았다. 그의 누이와 원치 않는 혼인을 하였을 때도 우직하게 저를 담는 눈빛에 시간을 삼켜냈다.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애처럼 굴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모지리는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에게 연심을 갈구하는 일도 이제는 사치였다. 저에게로 향하는 눈이 수천수백개가 되었다는 것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여는 자립하는 법을 몰랐다. 제가 걸어온 모든 걸음은 죄다 박중헌의 것이었다. 혼자 걸을 수도 없으면서 어찌 박중헌의 말을 새겨듣지 않을 수 있을까. 사방이 어두운 시각이었다. 매번 전장에서 돌아와 저잣거리의 신이 되어가는 김신과 오지 않는 왕을 기다리는 그의 누이. 힘이 없는 왕과 기울어가는 고려. 미천한 것을 쥔 손아귀에는 힘을 적당히 줘야하는 법입니다. 소중에 꼭 쥐고 나면 그 미천하고 소중한 것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 손에 의해. 마치 그 때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박중헌의 혀가 움직였다. 상장군 김신을 들라하라. 변성기가 막 지나 제법 굵직해진 목소리의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여는 가만히 눈을 감아야 했다. 검은 장막이 언제나처럼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분노와 염려를 담아 검을 내린다.”

 

될 수 있는 한 멀리가고, 할 수 있는 한 돌아오지 말라. 여는 제가 어떠한 목소리를 내는지 어떠한 단어를 문장으로 만들어 내뱉고 있는지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박중헌의 혀가 되어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제 앞에서 무릎 꿇은 김신, 누군가의 피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 얼마 만에 눈에 담는 것인가. 그에 대한 그리움은 이미 셀 수도 없었다.

 

“폐하, 그 말씀은. 폐하 어찌 그런.”

 

그 부름이, 지금의 나를 막을 수 있다면

 

“장렬히 죽었다 기별하라. 애통하다 기별할 것이니. 어명이다.”

 

좋았을 것을. 시선을 돌리면 뱀처럼 교악한 얼굴로 미소 짓는 박중헌이 있다. 불시에 피곤함이 엄습하였다. 여는 비로소 자신의 무력함을 알았다. 착실히 무너져가는 시간들이 김신의 어깨 위로 쌓여가고 있었다. 여는 그것이 못내 참을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사랑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 또한 그러했다. 김신은 저잣거리의 왕이 되어갔고 고려란 나라는 더 이상 황제인 제 것이 아니었다. 사랑받지 못했던 삶보다 더 두려워 진 것은 그 사실 하나였다. 무능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여는 자신의 강건함을 위해 박중헌을 동앗줄처럼 붙잡았다. 그 일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기억보다 무질서한 형벌은 없다고 믿는다. 신은 느리게 죽어가면서 그런 생각들을 주워섬겼다. 오시였다. 하루 중 날이 가장 화창한. 눈이 시려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원망했는데, 왕이었는지 신이었는지 아니면 나였는지,

 

‘분노와 염려를 담아 검을 내린다.’

 

신은 그 검의 끝이 자신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느리게 깨달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애써 외면했던 것이 원인이었을까. 그 후에도 수없이 뵙기를 청하였으나 황제는, 여黎는 변방으로 떠나란 교지만 전해왔다. ‘장렬히 죽었다 기별하라. 애통하다 기별할 것이니. 어명이다.‘ 검술이 어렵다며 우는 낯으로 제 뒤를 졸졸 따라오던 어린왕은 어느 새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리 말했다. 이 와중에 속도 없이 기특하구나. 신은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없듯이 제 마음이 여전히 주군을 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늘 그랬듯이. 여를 지켜달라는 선황제의 명 때문이 아니었다. 생동하는 그 작은 몸짓을 처음 눈에 담았던 순간부터 신은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것에 대한 묵직함을 줄곧 느껴왔다. 생지옥과 다름없는 전장에서 적군들을 물리치고 오로지, 그 얼굴 하나를 다시 보기 위해 돌아왔다. 일생의 무게감을 떠안고서. 적의 칼날은 정확하게 보았지만 자신을 향한 황제의 두려움은 너무 늦게 알았기에, 그것이 자신을 향해 겨눠진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었음을 신은 그 순간 한 번 더 외면해야했다.

 

‘그러니 더는 오지 마라. 멈추어라. 그게 뭐든, 멈추어라. 그 자리에 멈춰 역적으로 죽어라. 그럼 너를 뺀 모두를 살릴 것이다. 허나 단 한걸음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네 놈의 걸음 하나, 시선 한 번에 모두를 죽여 네 놈 발치에 깔아 줄 것이다.’

 

그 날 황제에게 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신信은 결국 닿지 못했다.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나아가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연유가 무엇이었는지. 이제 그것 또한 나만의 몫인가. 너의 고려를 지켰던 나에게, 넌 사랑받았다고. 숨이 붙어있는 한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말해주었으면 싶었으나 신神은 그것조차 허락지 않는 다는 듯 매정했다. 매정한 날갯짓으로 눈앞을 희게 물들였다. 별안간 쏟아져 내리는 비가 신의 몸 위를 삽시간에 적시었다. 피가 씻기어 내려가 그를 정결케 했다. 무슨 조화인지 하늘은 한낮인데도 온통 검었다. 신의 감은 눈 끝으로 빗물이 맺혀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흘렀다. 잔혹한 형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특별히 사랑하여.

 

 

생生은 사치였다. 신은 줄곧 그 문장을 떠올리면서 긴 비로 제 기분을 대신했다. 그만 좀 할 수 없냐는 덕화의 잔소리마저 멎었을 무렵에는 빗소리만이 세상의 전부 같았다. 저를 지키던 많은 이들의 죽음 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란, 그 참담함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제자리를 맴돌며 지나온 시간들을 곱씹는 것은,

 

“비 좀 그만 내릴 수 없나. 부주의한 도깨비. 네 덕에 세탁소를 몇 번이나 가는지 모르겠군.”

“세탁비 주잖아, 그래서.”

“그나마 양심은 있어 다행이라 생각 중이야.”

 

신은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검은 사내의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달라진 것이 하나 없는데 지척에 두고도 이리 늦게 알아본 것은 저의 무심함인가, 저 자의 무지인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웃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지구의 온 중력이 김신의 눈가로만 작용하는 듯 밑으로 고개 숙인 그의 눈꼬리가 퍽 유려했다.

 

“오늘 늦냐.”

“비 오는 날엔 망자가 기승을 부린다는 것쯤은 도깨비인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렇다면 수고,”

 

나의 어린 왕이자 주군이자 세상이었던 여黎, 네가 언젠가 저승사자라는 긴 업을 끊어내고 다른 생의 모습으로 내 곁에 찾아왔을 때 잊지 않고 말해주고 싶어서. 몇 천 년이 걸려도 좋으니 그 말을 꼭 건네고 싶어서. 연모하였다. 지금도 다름없이 연모한다. 어쩌면 아주 느린 이 고백을 위해 참혹한 생을 견뎌온 것은 아닌지. 우습지만 가볍지 않은 마음이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적림積霖같던 비는 멈춘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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