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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찬 달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어느 날,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시퍼런 액체가 그가 왔다갔노라, 알려주고 있었다.

 

 

 

 

 

Traces

 

 

 

 

 

새까만 어둠이 도시 곳곳에 퍼진 새벽, 적막감과 긴장감이 고요히 깔린 도시엔 달빛만이 고고히 빛났다. 그리고 구석진 골목엔 그만이 남길 수 있는 표식이 하나 둘 새겨지고 있었다. 그는 고상하게 웃음을 내비치며 제 손 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시퍼런 피를 바닥에 뚝뚝 떨구었다.

 

쫑긋.

 

저 멀리서 은밀히 움직이는 자들의 기척이 들렸다. 다른 이보다 예민했던 그는 이미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오히려 가소롭게 웃으며 제 피를 더욱 흩뿌리고는 달빛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골목으로 사라졌다.

 

 

 

**

 

 

 

"이번에도 허탕이다."

 

끼익. 기름칠을 하지 못해 삐걱거리는 문이 아버지가 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또 허탕이란다. 신은 손톱만큼이나 기대했던 제 자신을 탓했다. 집으로 들어오는 아버지에게선 쌉싸름한 알코올 냄새와 옅게 나는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고약한 냄새가 났다. 항상 똑같았다, 몇 년 동안.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려버린 아버지는 몇 달 동안 집 안에 박혀 술만 찾으며 신에게 호통을 하기 일쑤였다.

 

신은 아버지를 무척이나 원망했다. 하지만 그 핏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 하나 남은 피붙이를 버릴 심보는 못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재산을 탕진한 이후로 제 정신인 적이 아닌 적보다 확연히 드물었다. 그래도 제 정신일 적에는 이제 괜찮겠지, 손톱만큼이나 하던 기대를 하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술을 입에 달고 살며 제 기분이 비틀리면 온 집안의 물건을 부쉈다. 그렇게 신의 그 기대도 함께 부서졌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그 날 이후로 표적을 바꾸었다. 기울어가는 허름한 제 집에 말끔히 차려입은 신사가 찾아온 뒤로.

 

 

 

**

 

 

 

똑똑.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신의 집에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신은 몇 달 만에 자신을 제 집을 찾는 누군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잔뜩 경계한 채로 미동도 없이 문만 뚫어져라 있으니 곧이어 다시 똑똑, 문을 두드리며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을 미성이 귀를 타고 들어왔다.

 

"아무도 안 계신가요."

 

신은 잔뜩 긴장해있던 몸을 슬그머니 풀었다. 빚쟁이는 아니구나.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문 바로 너머에 있는 누군가에게 되물었다.

 

"누구... 신가요."

"김우진씨, 댁 아닌가요."

 

본능적으로 빚쟁이는 아닐 거라 느꼈다. 그래서 신은 더욱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럼 대체 누구인가. 몸은 신의 생각과 따로 놀았다. 안된다 생각했을 땐 이미 대문은 열고 난 후였다.

 

말끔히 차려입은 신사였다. 마치 귀족같이. 신은 다시 고양이처럼 잔뜩 경계했다.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그는 정말 이질적인 존재였다. 마치 그에게 홀린 것 같았다. 그가 제 집에서 대문 밖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았을 때야 신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그가 바로 폭풍이었다.

 

그 신사는 아버지에게 단 하나만을 제안했다. 아니, 제안을 가장한 강요였다. 돈이 급했던 아버지가 수락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내밀고서.

 

뱀파이어.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신사는 품에 있던 양피지 뭉치를 꺼내며 아버지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버지는 실로 오랜만에 제 정신으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뱀파이어' 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종족 같았다. 그들은 인간의 피를 먹으며 삶을 연명해간다고 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사람 같지만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피부, 사람의 피가 주식이고, 햇빛을 보지 못하며,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파랗게 변하는 피. 그리고 은으로 된 무기로만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평소엔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을 알아볼 수 없지만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긴 송곳니로 인간의 피를 마신다, 하였다. 그들을 왜 잡아들여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찮은 너희 아랫것들은 몰라도 된다.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얼굴에선 올라간 입꼬리가 슬쩍 보였었다.

 

 

 

**

 

 

 

아버지는 그 길로 그 신사를 따라간 그 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왔을 땐 정말 오랜만에 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때가 그 날 이후로 딱 이 년째 되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빚을 다 갚았다며 떵떵거렸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신을 의자에 앉히고 제 영웅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어느 귀족가의 수행원이었다. 아버지는 그를 따라가 꼬박 일 년 동안 훈련을 받고 뱀파이어를 잡으러 다녔더랬다. 그리고 뱀파이어 사냥을 하면서 그들을 잡아들이는 이유도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그들을 잡으며 피가 빨린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주변 동료들에게 물어봤더니, 이렇게 빨리는 게 마약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것이야. 귀족들이 좋은 것들은 죄다 숨겨놓고 그네들끼리만 즐기는 것이었어.

 

동료가 죽었을 때 눈물 찔끔 흘릴 수조차 없었다던 아버지의 몸 곳곳에선 옷 사이로 언뜻 많은 흉터가 보였다. 그제야 신은 아버지에게 신사가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귀족들은 미치도록 위험한 이 일을 은밀하고 빠르게 처리할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죽어도 탈이 나지 않을.

 

 

 

**

 

 

 

체계적으로 훈련해 잡아들이는 인간들을 막을 수 없었는지 뱀파이어들은 속수무책으로 잡혀갔다. 당연스레 그들의 수는 줄어들었고 훨씬 더 꽁꽁 숨어들어갔다.

 

그렇게 뱀파이어의 자취를 찾을 수 없을 때 쯤, 구석진 골목에서 새파란 피 몇 방울이 발견되었다. 귀족들은 앞 다투어 제 소속의 사냥꾼들에게 그 뱀파이어를 잡아오라 들볶았다. 모든 사냥꾼들이 다음 보름달을 숨죽여 기다렸다.

 

폭풍전야였다. 모두들 태풍의 눈으로 뛰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아무도 그를 잡지 못했다. 그는 저를 잡지 못하는 사냥꾼들을 비웃듯 항상 제 피를 뚝뚝 떨구고 사라졌다. 장소도 일정치 않았고, 그가 흩뿌리는 피의 양도 제멋대로였다.

 

 

 

**

 

 

 

아버지가 들어오지 않은 지 보름이 다 되었다. 그리고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보름달이 환하게 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가 나타나는 날이었다. 몇 달 동안 보름에 제 피를 뚝뚝 떨구어 흔적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뱀파이어. 불과 지난달에도 아버지가 허탕쳤다며 그 이후로 몇 년간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진창 마시고 들어온 게 엊그제 같은데.

 

쾅쾅쾅.

 

갑작스레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신이 움찔 떨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이가 없는데. 자연스럽게 그 날이 떠올랐지만 그 기억을 애써 무시하고 대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대문의 조그만 틈 사이로 건너편을 보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고 누군가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당황스러울 틈도 없이 대문이 닫히고 들어온 누군가가 털썩 쓰러졌다.

 

피?

 

배를 부여잡고 쓰러진 그의 손에는 온통 시퍼런 피로 범벅되있었다. 처음이었다. 아버지를 통해서 상상해온 뱀파이어를 실제로 보는 것이. 새까만 어둠을 닮은 제복을 입은 그는 신의 상상보다 훨씬 고혹적이고 매혹적이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본 채로 굳어버린 신의 시선은 홀린 듯이 그의 얼굴만을 따라다녔다.

 

"왜, 너도 피 빨아줄까?"

 

배를 부여잡고 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목소리는 온 몸에 상처 입은 것과 달리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순간 보이는 송곳니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신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털썩.

 

다가오는 신보다 그가 더 빨랐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밖에서 점점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냥꾼이다. 순간 제 아버지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몸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은 그를 안아들어 서둘러 제 방으로 데려갔다. 온 몸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저와 다른 온도가 그가 사람이 아니라 상기시켜주었다. 나무에 얇은 시트 한 장 얹은 침대는 신의 품에 안긴 그에 비해 훨씬 초라해보였다.

 

신은 조심스럽게 그를 눕히고 긴 천을 가져와 그의 배에 동여매었다. 억눌린 신음이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다시 천을 들고 마당으로 나와 그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새하얗던 천은 금세 새파랗게 물들었고 신은 마치 쫒기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그의 피를 닦아냈다. 내가 뱀파이어에게 홀렸구나. 이미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

 

 

 

신은 시퍼렇게 변한 천을 황급히 침대 밑으로 우겨넣었다. 그리고 침대에 잠들어 있는 그를 흘깃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가 대문 밖을 보려던 찰나,

 

툭.

 

돌멩이가 채이는 소리가 들렸다. 신은 숨죽여 대문에 바짝 붙어 밖을 엿들었다.

 

“여기로 가지 않았나?”

“이 길이 확실한데.”

“피 비린내...”

 

신은 숨을 훅 들이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흔적을 다 지워냈다고 생각했는데, 냄새가 남아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어?”

“피 비린내는 이것 때문이었나.”

“상처를 보니 뱀파이어가 한 짓 같은데.”

“그럼 저 쪽으로 가보지.”

 

그들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그들이 왔던 반대편으로 뛰어가는 듯했다.

 

신은 그들이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대문을 열어 밖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아까는 눈치채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의 피 비린내가 신을 덮쳤다.

 

고양이였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몸을 숙여 고양이를 쿡 찔러보자 이미 죽은 지 한참이나 되었는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온 몸엔 할퀴어진 상처가 가득했고 등에는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것 같은 길게 베인 상처로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신은 아무렇지 않게 그 고양이를 품에 안아 마당에 묻었다. 때마침 해가 떠올라 봉긋이 솟아오른 땅을 비추었다.

 

 

 

**

 

 

 

신이 제 방으로 들어갔을 때엔 그가 이미 깨어있었다. 그는 마치 다친 일이 없었다는 마냥 새벽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말끔한 모습이었다.

 

“나를 왜 구해준 것이지?”

 

빙글빙글 웃는 모습에 좀 전까지 다친 이가 아니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너, 내가 뱀파이어인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제 혀로 입술을 축였다.

 

“너도 빨려보고 싶었구나?”

 

그의 말에 입술만 달싹였다. 아니라고 부정해야 하는데,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차마 그 말이 입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

 

 

 

그가 어쩌다 콕 집어 제 집의 문을 두드렸는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신과 눈이 마주치면 그저 씨익 웃어보이는 자태에 넋이 나가는 것이 수 번. 신은 그에게 그 어느 것도 묻지 못하고 제 아버지가 오면 숨어있으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동이 뜨고도 한참 뒤에나 대문을 끼익거리며 열고 들어왔다.

 

“여기서 나오지 마세요.”

 

신은 다급히 그를 옷장 속으로 우겨넣었다. 아버지에게 들키는 날엔 그도, 저도 온전하진 못하리라.

 

“네가 원한다면.”

 

그는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고 순순히 옷장 속으로 들어갔다. 새벽의 그가 아닌 것 같아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보다 그를 숨기는 데에 집중했다.

 

탁.

 

옷장 문을 닫고 방을 나서자 아버지는 지난달과 같은 모습을 하고 집 안을 들어왔다.

 

“그 놈만 잡으면 빚을 다 갚는 건데.”

 

으득. 아버지는 이를 갈며 술병에 남은 술을 모조리 들이켰다. 신은 아버지가 그대로 집을 나가길 빌었다. 아니, 그 전에 그가 조용히 있길 바라는 것이 먼저였다.

 

아버지는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식탁에 앉아 창고에서 술을 가져와 연거푸 마시더니 그대로 벌 일어나 집을 나섰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히끅, 못 온다. 이번에야말로 그 놈을 잡을 테야.”

 

신은 이를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를 배웅했다.

 

 

 

**

 

 

 

그는 다 상처가 다 나아보였지만서도 신의 집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은 이번 달까지만이다, 못 박아도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너, 나에게 궁금한 건 없어?”

 

그와 지내게 된 점 중 하나는 그가 말을 돌릴 때 말려들지 말아야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신이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난 네 이름이 궁금한데.”

“아,”

 

우린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구나. 신은 그제야 깨달았다. 며칠 지났다고 금세 편해져버린 그였는데 통성명도 하지 않았구나.

 

“김, 신이요.”

“나는, 음...”

 

그는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먼저 이름을 알려달라 말한 건 그였으면서.

 

“내 이름은 왕여.”

 

그가 이름은 알려준 건 조금 뒤였다. 신은 여가 입을 열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왕여. 그의 얼굴을 보며 입 안에서 그의 이름을 굴려보았다. 그와 미칠 듯이 잘 어울렸다.

 

“뱀파이어가 인간에게 이름을 알려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신은 갑작스런 질문에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 무언가 있나?

 

“그 인간과 인연이 묶여. 다음 생에도. 그저 속설이지만.”

 

여의 말에 처음 그를 봤을 때처럼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점점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닿지 않는 깊숙한 골목으로 사라졌다. 여에게 들릴까 겁이 났다.

 

 

 

**

 

 

 

그 날을 기점으로 그들의 관계는 미묘하게 달라졌다. 둘이 눈을 마주치는 횟수가 부쩍 늘고, 몸이 은근히 맞붙는 횟수가 늘었다. 그리고 여가 신의 목덜미에 시선을 두고 있을 적이 늘어났다.

 

 

 

**

 

 

 

“여...님. 몇 달 동안 잡히지 않았다던 뱀파이어가, 당신이 맞죠?”

 

마침내 다음 보름달이 신의 마음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제 존재를 알리며 커다랗게 떴다. 여는 자연스럽게 제 손 끝을 깨물었다. 곧 그 날 밤 보았던 새파란 피가 방울져 손 끝을 타고 흘렀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지."

"...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냥."

"이유는 궁금하지 않고?"

 

여는 항상 신이 긍금해하지 않느냐, 물었다.

 

"우매한 인간들에게 뱀파이어는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상기시켜주려고. 그런데 너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군."

 

생긋. 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신과 여의 사이엔 정적만이 흘렀다. 서로의 숨소리에만 귀 기울이며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여가 신의 품속으로 당겨졌다. 둘의 입술이 맞붙었다.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숨을 섞어나갔다. 신은 여의 모든 것을 삼킬 듯 여의 입 안을 침범해 빠르게 그 안을 훑었다. 여는 곧장 신을 휘감으며 그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불안한 심의 심장은 계속해서 엇박자로 뛰어댔다. 신은 제 심정을 감추려 여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집 안은 두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신은 여의 입술을 제 마음껏 탐하고 천천히 떨어졌다. 하지만 여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질척한 아쉬움이 뒤따랐다. 여는 그런 신을 안다는 듯 옷깃을 젖혀 매끈한 신의 목을 콱 깨물었다. 뜨끈하고도 빨간 액체가 여의 입가를 적시기 시작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신은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여와 관계를 할 때만큼이나 격렬한 자극이었다. 이제 여의 차례였다. 신의 온 몸을 돌고 있는 피로 그의 모든 것을 가지려는 듯 피를 빨아먹은 데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신의 피를 탐닉하던 여는 다급히 송곳니를 뽑았다. 순간 마주친 두 눈엔 무언가를 향한 두려움이 스쳐지나갔다.

 

"만약 잡힐 위기에 처했다면 네가 나를 죽여.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을 살게 될테니까."

 

"꼭 네 손으로."

 

그리고 그는 미련 없이 신의 품에서 빠져나와 담을 넘어 나가려 했다.

 

쿵.

 

여가 다시 마당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쾅. 삐걱거리던 대문은 이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만큼 나가 떨어졌다.

 

"네 놈. 여기 있었구나. 그래, 다친 몸으로 멀리 가진 못했을 테지."

 

그 날의 그 목소리였다. 그들의 가슴 가에 십자가 문양의 브로치가 달빛에 반짝였다. 아버지와 다른 소속이다. 신이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그들은 여에게 달려들었다. 여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들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신의 집은 난장판이 되었다. 은으로 만들어진 무기들은 달빛에 번쩍이며 여를 해치려들었고 여는 맨 손으로 그들을 집어던지고 목을 비틀고 배를 할퀴었다.

 

쨍그랑.

 

처음 보는 광경에 굳어버린 신은 제 발에 밝힌 금속이 울리는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미 여의 손에 죽어 피를 흘리고 있는 시체가 떨어뜨린 칼이었다. 신은 홀린 것처럼 그 칼을 집어들었다. 고개를 휙 돌려 여를 바라보았을 땐 여는 배를 부여잡으며 온 몸에 파란 피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때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었구나. 어쩐지 여는 이따금씩 긴 한 숨을 내쉬었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확인했을 땐 흉터 밖에 남아있지 않았는데. 신은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그 속을 뛰어 들어가 여의 뒤에서 목을 노리던 사냥꾼을 칼로 찔렀다 비틀며 빼냈다. 뒤에서 들린 인기척에 여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던 놀란 눈으로 신을 보던 것도 잠시, 그들은 잠깐의 틈도 주지 않았다. 신이 그들이 적인 것이 확실해진 이상, 그들은 여를 생포하려하면서 신의 목숨을 노렸다.

 

"그냥 도망갈 것이지... 사냥꾼의 아들답군."

 

사냥꾼은 한 번 손에 넣은 먹이감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제 아버지가 그랬고, 신도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검술이라곤 용병이었던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다였던 신은 금세 사냥꾼들에게 밀렸다. 차라리 여의 말대로 도망가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여의 꼬리만 잡을 바엔. 신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여를 위해 처음으로 제 손에 피를 묻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또 다시 여의 뒤가 위험했다. 여과 같이 피투성이가 된 신은 결국 그의 앞에 달려들었다. 칼이 살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털썩.

 

신이 여에게로 무너졌다. 여는 파란 피와 빨간 피로 범벅된 손으로 신의 등에 손을 대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마셨던 향긋한 향기가 코 끝을 찔러왔다.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사냥꾼들을 날려버리는 데엔 거침이 없었다.

 

"여,님.... 죄송,합니다..."

 

여는 분노에 차 눈빛으로 사냥꾼들을 몰살시켜버렸다. 신은 입술을 깨물며 울컥올라오는 피를 뱉지 않으려 참았다. 여가 천천히 걸어와 신의 앞에 주저앉았다. 여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들이, 또 오고 있어. 이번엔 너의 아버지도 오고 있군."

 

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빛으로 신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나를 죽여. 이대로는 곧 잡힐 것 같거든."

 

여는 마지막까지 신을 보며 생긋 웃었다. 이 웃음에 홀려버렸었지. 신은 후회할 여력도 없었다. 마지막일 여의 얼굴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그리고 최대한 시간을 끌고 싶다는 듯 천천히 칼을 들어 여의 심장께에 그 끝을 대었다. 푹. 살이 궤뚫리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제 아버지의 고함과 함께.

 

여의 입에서 울컥 새어나오는 새파란 피는 영롱하다 못해 아름다웠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신은 곧바로 칼을 빼내었다. 드디어 눈을 감았다. 칼날은 여에게 그러했듯 망설임 없이 신의 심장을 궤뚫었다. 휘청. 그대로 몸이 땅으로 추락했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떼내었을 땐 계속해서 피를 쏟아내는 여의 얼굴이 보였다. 그 뒤로 제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신의 시야가 닫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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